종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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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1.2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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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사랑은 행복한 기다림
김훈일 주임신부(초중성당)

왼쪽 가슴 빨간 딱지에 3987이라는 수인 번호가 새겨진 남자가 있다. 세 사람을 죽인 사형수인 그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스물일곱의 '윤수'다. 가난하고 추웠던 어린시절과 사랑하는 동생을 잃어버린 윤수에게 삶이란 의미가 없다. 그는 사랑을 배우기도 전에 삶의 절망과 고통을 먼저 체험했다. 교도소의 차가운 바닥이 그에겐 오히려 따뜻하다. 죽음만이 그의 희망이다.

세 번째 자살을 실패한 여자가 있다. 복이 넘쳐 좋은 집안에 부러움 없이 성장한 '유정'이다. 그러나 유정은 열다섯의 나이에 사촌오빠에게 성폭행 당한다. 피해자인 그녀를 어머니마저 외면한다. 그녀는 상처 받았지만, 상처를 준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인다. 그래서 그녀도 삶보다 죽음이 더 간절하다. 죽음만이 그녀의 희망이다. 어느 날 사형수를 돌봐주던 고모 수녀님의 부탁으로 두 사람은 교도소에서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죽음과 절망을 넘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과 희망이라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올해 개봉돼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영화 내용이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사형이 집행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많은 눈물과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서로를 용서하고 희망하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딸을 살해한 윤수가 진심어린 용서를 청하자 이 어머니는 윤수를 용서한다. "내가 널 죽여서 내 딸이 살아온다면 널 죽이고 내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겠지만, 널 죽인다고 해서 내 딸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깐 내가 너를 용서 해줄게. 대신 내가 멀어서 자주 오지는 못하겠지만, 추석이고 설이고 계속 올 테니까 그때까지 살아만 있어라.'

유정도 윤수의 죽음이 가까워 오자 어머니를 용서하기로 한다. "엄마는 죽지마. 엄마를 용서하는 게 내가 죽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하느님은 알꺼야. 그래서 엄마를 용서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그 사람 안 죽을 수도 있을까봐.'

윤수와 유정은 자신들에게 상처를 주고 절망을 준 이들에게 아무런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가해자인 그들은 아무런 일도 없이 행복해 보인다. 오히려 상처받고 미워하고 증오에 차 죽음을 희망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한다. 이렇게 사랑은 절망을 이기고 피어나올 때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가진다. 그들의 용서와 화해는 모든 것을 회복하고도 모자람이 없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사랑의 시간은 참 위대해 보인다. 하느님의 사랑도 그렇다. 십자가의 예수님도 인간의 역사에 잠시 개입했지만 그 사랑의 시간은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만드셨다.

한해가 가고 있다. 하느님은 또 새로운 시간을 주실 것이다. 가톨릭의 전례력으론 12월 첫 주가 새해가 되며,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보낸다. 대림절은 세상에 평화를 주시는 아기 예수의 탄생과 재림하실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올해도 하느님의 사랑이 절망하고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을 주신다.

이 영화처럼 극적이지는 않겠지만, 우리들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희망의 시간을 찾아보자. 누구를 용서할까. 누구에게 용서를 청할까. 누구를 사랑할까하는 기다림으로 내일을 맞이해 보자.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롭고, 희망차며, 사랑 넘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즐겁게 놀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내일을 기다린다면 삶의 실패와 고통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인생이라는 시간에 사랑하고 용서했던 날들이 가득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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