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인생의 베일
  • 정선옥 <음성도서관장>
  • 승인 2015.10.1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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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권하는 행복한 책읽기
▲ 정선옥 <음성도서관장>

 

가을 하늘이 투명하다. 가을에는 딱딱한 책보다는 말랑말랑한 소설이 좋다. 그동안 세계문학 전집은 지루하다는 고정관념으로 멀리했는데 요즘 책의 깊이와 읽는 맛이 느껴지는 고전문학이 끌린다. 주말에 가끔 중고서점에 들러 전집을 수집하는 즐거움도 누리고 있다. 책 표지와 형태가 동일한 전집은 책장에 꽂아두면 빛이 난다. 최근에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민음사)’을 읽었다. 서머싯 몸은 의학을 전공했지만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 그의 대표작은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 ‘면도날’ 등이 있다.
 철학자 강신주는 ‘감정수업’에서 잔혹함에 대한 감정을 다루면서 이 소설을 예시로 들었다. 주인공 키티는 바람둥이 찰스와 외도한 사실이 들통나자 남편 월터에게 그동안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도리어 화를 낸다. 아내의 외도와 당당함에 화가 난 월터는 그녀에게 잔인한 말을 한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결국 월터는 키티에 대한 복수와 잔혹함으로 콜레라가 발생한 도시로 데려가고 의사로서의 사명감에 충실한다.
 삶이 무료했던 키티는 사람이 죽어가는 도시에서 수녀원의 고아들을 돌보며 의미 있는 삶을 시작한다. 동료 수녀와 환자들이 죽어가는 그곳에서 늘 한결같이 고아를 챙기는 원장 수녀의 모습을 보면서 키티는 숭고한 사랑의 감정도 느끼게 된다. 원장 수녀는 키티에게 “마음을 얻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자신이 사랑을 주고 싶은 대상처럼 자신을 만들면 되지요.”라는 말을 남긴다. 시간이 흐르고 키티는 월터와의 관계를 회복하지만 그는 콜레라에 전염되어 죽는다. 키티는 늦게나마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홀로 남겨진 아버지와 남은 여생을 보낼 준비를 한다.
 이 책은 허영과 욕망이라는 인간의 굴레를 극복해가는 주인공 키티의 아픈 성장을 통해 진정한 사랑,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성장소설이며 러브스토리다. 사랑 없이 나이에 떠밀려 결혼한 키티에게 찰스는 불꽃 같은 사랑을 깨닫게 해준 존재로 생각했다. 그러나 키티가 손을 내밀 때 찰스는 망설임 없이 외면한다.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던 관계는 한때의 어긋난 욕망이었다. 작가는 주인공 키티의 관점에서 여자의 일생을 다루면서 감정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과정을 다뤘다. 첫 만남의 설렘, 결혼, 배신, 갈등, 용서, 화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소설은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제목으로 세 번씩이나 영화화되었다. 얼마 전 배우 나오미 왓츠와 에드워드 노튼 주연의 오래된 영화를 봤다. 영국의 고풍스러운 풍경과 결혼 후 살게 된 중국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펼쳐진다. 소설과 영화는 다른 빛깔로 여운을 남긴다. 소설이 주인공의 심리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영화는 주인공의 절제된 감정과 시각적 풍경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췄다. 대부분 원작보다 영화가 못하지만 인생의 베일은 소설 읽는 즐거움과 영화 보는 즐거움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깊어가는 가을, 깊이 있는 한 권의 고전 소설을 읽고 동명의 영화로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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