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의 고구려 비석, 충주고구려비
국내 유일의 고구려 비석, 충주고구려비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5.10.0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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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국내 유일의 고구려 비석인 충주고구려비는 국보 205호로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어귀에 위치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초라한 비각 속에 쓸쓸하게 서 있었는데, 최근 남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강 언덕에 작은 전시관을 갖추고 비석과 함께 다양한 고구려 역사 자료들을 전시하고 역사 교육에 제 역할을 감당하고 있어 다행이라는 마음이 든다.

충주고구려비는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이용하여 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크기는 작지만 비석의 모양이나 글씨체로 보아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의 4면 모두에 글씨를 새긴 4면비 형식을 갖추고 있다. ‘고려대왕(高麗大王)’‘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왕 및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의 글자가 보이고 있다. ‘신라토내(新羅土內)’와 같이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도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이 확실하다.

비의 주된 내용은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을 하면서 고구려가 형, 신라가 아우국가가 된다는 기록과, 고구려의 영토가 소백산맥을 경계로 조령과 죽령에 이르게 된다는 기록도 있어 고구려 장수왕 때의 업적을 적은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영토를 넓힌 후 신라와 국경을 정하여 세운 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의 발견으로 여러 가지 사실들이 밝혀지고 확인되었는데, 첫째, 신라를 지칭할 때 ‘동이’라고 한 것과 신라왕을 ‘매금’이라고 하여 열등한 나라로 표기하였다. 둘째, 신라왕에게 의복과 같은 선물을 하사하는 것을 볼 때 고구려와 신라는 형제관계 내지 상하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셋째, 신라 영토 안에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로 양국 간에는 정치적 관계뿐만 아니라 물물교환, 문화교류 등으로 고구려 문화가 신라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남한강변인 이곳에 비가 세워졌다는 것은 이곳이 고구려에겐 신라, 백제를 향한 남방 공략의 요충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에서 비석의 형태로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동양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집안의 광개토대왕비다. 당시 중국의 비석은 묘비의 용도로 세워진 직사각형의 비석 형태인데, 양면에 글자를 새긴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왕릉비부터는 중국적 형식 및 내용과는 완전히 달리한 새로운 돌기둥 형태의 4면에 모두 글씨를 새기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중국의 비석문화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선돌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후 충주고구려비와 신라의 울진봉평비, 마운령, 황초령비 등으로 나타난다. 결국 비석 문화가 중국에서 도입되었지만 고구려에 와서는 중국의 묘비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독자적 비석문화의 전통을 수립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문화란 지속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만 언제나 새롭게 재해석되고, 재창조되어 계승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국내 유일의 고구려비라는 사실에 조상의 웅비를 추억만 할 것이 아니라 21세기 세계를 향해 웅비할 미래 한국을 준비하고 나아가는 초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충주고구려비를 바라보는 우리 아이들의 눈과 마음에 대륙을 향해 포효하던 자랑스런 조상 고구려인의 기상을 품고 통일 한국이 나아갈 기상으로 승화시킬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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