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공원 압각수
중앙공원 압각수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5.10.01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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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지난 9월 24일 딩아돌하문예원이 주최한 신동문문학제에서 청주 출신 박정희 시인이 ‘청주 중앙공원’이라는 자작시를 낭송하여 많은 관중의 호응을 받았다. 시(詩)에 대해서는 도통 문외한인 필자도 깊이 감동을 받았던 것은 청주시민이면 모르는 이 없는 중앙공원 은행나무를 더욱 친근하도록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날 청주 사람들은/중앙공원에 간다/청주 시인들은/시를 쓰고 나서/나무 곁으로 간다/기대고 앉아도 되는 자리/맡아놓은 듯/넉넉히/은행나무 천년/등에 지고 앉는다/바람 상큼/싱그러운 날/졸업식 결혼식 치르고/청주 사람들은/공원에 간다/은행나무 머리에 이고/사진을 찍는다

중앙공원 옆 도립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신동문 시인을 문병하던 때를 그리며 지은 추모시의 일부지만 은행나무에 대한 청주사람의 감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중앙공원 한 가운데에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이 은행나무의 공식 명칭은 압각수(鴨脚樹)로서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어 각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

은행나무를 압각수라 표현한 것은 오래된 은행나무의 밑 둥지가 오리의 정강이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또는 은행잎이 물갈퀴로 붙어 있는 오리의 발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도 하는데 뜻으로 보면 오리발에 더 가깝다. 은행나무는 달리 공손수(公孫樹)라 불리기도 한다. 공(公)은 다른 사람을 높이는 말이고 손(孫)은 손자를, 수(樹)는 살아 있는 나무를 일컫는 말이다. 은행나무가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80년은 넘어야 하므로 적어도 손자나 그 후대에 수확의 결실을 보게 된다. 즉 은행나무는 눈앞의 이익이나 당대의 수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손을 위해 심은 미래투자 나무였던 것이다.

중앙공원 압각수는 천년이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지켜보았다. 문헌에 보이는 첫 사건이 이른바 ‘이초(彛初)의 난’이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을 재촉한 이 사건은 1390년(공양왕 2) 5월에 일어났다. 파평군 윤이와 중랑장 이초가 명나라 황제(주원장)를 찾아가 이성계가 공양왕을 새 임금으로 세운 뒤 곧 명나라를 치려 할 뿐 아니라 이를 반대하는 재상 이색과 조민수·우현보·이숭인·권근·변안열 등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고하였다. 이 소식이 고려에 전해지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이색 등 10여 명이 청주옥에 갇혔다. 문하평리 윤호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국문하려 할 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져 무심천이 넘쳐 읍성의 남문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북문까지 뻗치니 관아가 온통 물에 잠기고 민가가 떠내려갔다. 이때 관리들이 객관 문 앞의 은행나무로 올라가 죽음을 모면하니 왕이 소식을 듣고 이는 이색 등이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석방하였다.

또한, 압각수는 임진왜란 때 청주읍성이 왜군에 함락되었다가 조헌 박춘무 영규대사 등의 의병군에 의해 탈환되는 생생한 장면을 목격하였을 것이며, 이인좌의 난의 모든 과정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구한말 동학군과 관군의 전투에서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지 못해 온몸으로 막아섰고,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으로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앞에서 울분과 통곡으로 헤어지는 군인들의 뒷모습을 말없이 전송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908년 6월 충북도청이 충청병영의 빈자리에 자리한 후 1937년 6월 지금의 도청으로 옮기기까지 29년 동안 충북도청의 정원을 말없이 지켜왔다. 며칠 후면 압각수 잎이 중앙공원을 온통 노랗게 물들일 것이다. 그러면 청주사람들은 공원에 가서 은행나무를 머리에 이고 사진을 찍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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