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죽음에 대한 해석
사도의 죽음에 대한 해석
  • 조한필 부국장 <천안·아산>
  • 승인 2015.09.29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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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추석 연휴 영화 ‘사도’를 봤다.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 사도세자가 정말 아버지 영조를 죽이려 했을까? 영화는 이것을 사도가 죽은 직접적인 이유로 묘사했다. 둘째, 하필이면 왜 뒤주에 가둬 죽였을까?

사도세자가 죽은 지 3개월여 흐른 8월 26일(음력) 세자의 장인이자 좌의정 홍봉한이 영조에게 글을 올렸다. 1762년 윤 5월 13일에 벌어진 ‘13일의 처분’(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총정리 글이다.

“병이 더했다 덜했다 끝이 없었고…아! 점점 도가 지나쳐 차마 말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러, 성상(영조)으로 하여금 13일의 처분이 있게 될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어 영조의 행위를 두둔하고, 자신의 딸이자 세자비인 혜경궁 홍씨(혜빈)를 옹호했다.

“그날 성상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유시하시기를 ‘…내가 어찌 자애롭지 않아서 그랬겠으며 내가 어찌 참지 못해서 그랬겠는가? 진실로 종사(나라)를 위한 것이요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살아서 저와 같이 될 바에는 차라리 죽어서 이와같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혜빈이 세손(정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스스로 운명을 슬퍼할 뿐이다. 장차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허물하겠느냐? 나와 네가 지금까지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상 때문이며 의지하고 목숨을 맡길 분도 오직 성상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자의 친어머니 영빈의 ‘용단’을 치켜세웠다.

“사세가 말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르렀으니 부득이 전하를 위해 울면서 고하였으니 대의를 당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끊는 것은 남자도 하기 어려운 바를 해낸 것입니다.”

세자의 어머니, 부인, 장인 등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동조하거나 묵인했다. 세손(정조)이 임금이 되는 길을 열기 위함으로 치부됐다.

세자의 죽음에 대해선 정치적 및 개인적 이유가 함께 거론되고 있다. 노론의 세상에서 소론을 가까이 했던 세자, 정신병을 앓다가 궁인·환관까지 살해한 세자. 하지만 영조 시해를 입에 담았다는 증거는 없다. 한 해 전 영조 모르게 관서(關西)지방을 여행한 것도 역모와 연결짓기엔 거리가 있다.

역모는 사형이다. 사형은 교수형, 사약, 참수형, 거열형, 능지처사 등으로 집행된다. 세자가 역모로 몰리면, 영조와 세손이 대역죄인의 직계혈족으로 엮인다. 사형은 피해야 했다. 세자는 자결을 거부했고 그래서 뒤주가 선택된 듯하다.

사도는 성장하면서 점점 영조의 기대에 못 미친 세자였다. 공부보다 무술에 관심이 많았고, 대리청정 때 정치적으로 영조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때마다 영조의 불 같은 꾸중이 뒤따랐고 사도는 불안감에 떨었다.

죽기 2년 전인 1760년 7월, 세자는 온양온천에 휴양차 갔다. 천안 직산에서 하루 묵을 때 호종하던 병사들이 구경나온 주민들을 때려 쫓아내자 그러지 말라고 분부했다. 8일간 온궁(溫宮·현 온양관광호텔)에 머물렀다. 이곳서도 좋아했던 궁술을 연마했고 기념으로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 후일 정조는 부친을 회상하며 이곳에 영괴대비(靈槐臺碑)를 세웠다.

영조는 세자를 미더워하지 않았다. 함께 온천 다녀온 신하를 불러 여행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신하들도 마찬가지다. 대사헌은 세자가 공부와 정사에 힘써야 한다고 상소했고, 좌·우의정은 몇 달째 영조를 뵙지 않는 세자에게 알현을 재촉했다. 부자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세자는 고립무원이 됐다. 죽음이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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