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어려움
말의 어려움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5.09.24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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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그건 객관적이지 않아요”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항변(抗辯)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입니다.

‘객관적(客觀的)’이란 말이 쓰기가 그리 쉽지 않은 말이긴 합니다. ‘길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보는 것처럼’의 뜻으로 보면 알 듯 모를 듯하게 되고,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건이나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는 것’이라고 다가서면 딱딱하게만 여겨지니까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앉은 자리에서 곧바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보라고 주문을 했던 겁니다. 평소 자신의 얼굴을 세밀하게 관찰해 온 전문적인 화가가 아니고서야 당혹스러운 경험이 되겠죠.

별로 닮은 구석이 보이지 않는 그림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민 그에게 다른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더듬더듬 그려내고 있는 동안에 그림 솜씨가 남달리 있는 것도 아닌 다른 사람이 그의 얼굴을 자분자분 풀어낸 그림이었습니다.

“어쩜, 저랑 많이 닮았네요. 신기해라”라는 반응을 보이던 그에게 이때다 싶어 얼른 하고 싶었던 말을 했습니다.

“그게 객관적이라는 겁니다.”

속닥거리든 왕왕 대든 말을 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녹록하지 않군요. 말의 뜻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한 채 섣불리 내뱉기도 하지만 아예 말문이 막힐 만큼 난감한 때도 있으니까요.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먼저는 ‘눈부처’를 바로미터(barometer)처럼 쓰면서 말을 하는 게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눈동자에 비치어 나타난 사람의 형상이 눈부처이니 대화의 상대가 되는 사람의 눈동자에 비치어 나타나는 나의 형상이 평온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는 즉시 말을 삼가는 게 어떨까 합니다. 잔뜩 일그러진 모습의 내가 하게 되는 말이 상대에게 덕이 되는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요.

또한 고생한 끝에 얻게 된다는 ‘곤이지지(困而知之)’의 삶이라도 살자는 생각입니다.

우리 사회의 병은 ‘곤경을 겪고도 알지 못한다’는 ‘곤이부지(困以不知)’로서 곧 소통의 부재가 원인이라는 것은 이미 몇 년 전 새해 벽두에 이 시대의 석학으로 불리는 신영복을 통해 갈파된 적이 있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잘만 지내던 이와 멀어지게 된 곤경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아무도 헐뜯지 말라네요. 그저 비방(誹謗)만 멀리 해도 설화(舌禍)만큼은 피해갈 수 있을 겁니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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