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년전 헤어진 가족 이젠 가물가물 죽기전에 고향땅 한 번 밟는 게 소원”
69년전 헤어진 가족 이젠 가물가물 죽기전에 고향땅 한 번 밟는 게 소원”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5.09.2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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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철산 고향 정신학 할머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랩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평안북도 철산이 고향인 정신학 할머니(91·대전시 유성구 신성동)는 80여 년 전 집 마당에서 공기놀이를 하며 흥얼거리던 동요 ‘고향의 봄’을 아직도 기억한다. 구순을 넘기고도 동요는 기억나는데 70년 전 헤어진 친정 부모와 오빠 얼굴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정 할머니는 부친 이름울 ‘정우각’이라고 또렷하게 말했지만 모친 이름은 “장…장…장… 뭐였더라. 이름도 까먹었네”라며 끝내 성만 기억해냈다.


가족과 살았던 날보다 헤어져 산 날이 길다 보니 북에 두고온 친정 부모도, 6살 많은 오빠(정지학·생존했다면 97세)도, 5살, 7살이었던 조카 얼굴도 희미하다.

정 할머니는 친정식구들과 69년 전인 22세때 헤어졌다. 고모가 중매한 평북 의주(현 신의주) 남자(고 김명관)를 만나 21세에 결혼했다. 결혼 후 아이를 가졌고, 출산을 위해 간 친정에서 몸조리를 이유로 21일을 머문 게 마지막이었다.


정 할머니는 “친정에서 삼칠일을 보내고 의주 시댁에 갔더니 남한으로 내려간다며 홀시아버지와 시숙부부가 짐을 다 싸놓았다”며 “시댁은 30~40마지기 농사를 짓는 소지주였지만 나라에 곡식을 다 뺏겨 먹을 게 없어 굶는 일이 많았다. 시댁에서 하룻밤 잔 뒤 태어난 지 22일 된 딸을 둘러업고 시댁 식구들과 개성(당시 남한땅)으로 가는 기차에 오른 게 엊그제 같은 데 69년이 흘렀다”고 말했다.

어릴 적 찍었던 사진도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짐을 줄이겠다고 의주 사는 큰고모집에 맡긴 보따리 속에 들어 있어 정 할머니의 집에는 사진 한 장이 없다.

정 할머니는 1925년 철산에서 태어났다. 아들을 낳고 6년 만에 얻은 외동딸을 친정 부모는 애지중지 키웠다. 먹을 것 없던 시절 외동딸이 좋아하는 찰떡을 만들어주기 위해 어머니는 힘든 절구질을 하셨다. 어머니는 붉은 팥이 들어간 잡곡밥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마당에 앉아 늘 키질을 하셨다.

부모님은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철산 차련관 공립 보통학교를 보냈다. 집에서 10리나 떨어진 학교를 가기 위해 정 할머니는 6년간 매일 새벽에 일어났다. 부모님은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가는 딸을 위해 호롱불을 밝혀 주었고, 10리 길을 또다시 걸어 밤길을 오는 딸을 위해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정 할머니는 “보통학교 6학년 때 중국 안동(현 단둥시)으로 졸업여행을 갔는데 어머니는 밥 위에 계란후라이를 얹은 도시락을 싸 주셨다”며 “젊은 시절 도시락을 쌀 때마다 북에 있는 부모님이 생각이 나 눈물을 훔친 적이 많다“고 말했다.

정 할머니는 차련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오빠가 자리 잡은 평안남도 강계시 유동으로 부모님과 이사를 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강계수력발전소에서 4년 근무한 정 할머니는 회사 내 부속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원을 보고 간호원이 되고 싶어 18세 때 간호사 양성학교가 있는 일본 동경으로 떠났다. 2년 동안 일본에 머물며 간호원 자격증과 산파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1945년 8월15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 할머니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 얼굴 못보고 죽을까 봐 학원 원장에게 ‘부모님이 위독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일본을 떠났다”며 “여수항에서 집에 갈 기차표가 없어 무작정 파출소에 들어가 표값을 빌려달라고 역무원에게 졸라서 얻은 표로 무사히 집으로 간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서울 마포에서 3년을 살았던 정 할머니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4 후퇴 때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을 갔다. 피난민이 눌러앉아 번지수도 625번지인 대구시 신암동에서 정 할머니는 50년을 살다 10년전 대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결혼 전 징용군으로 다녀온 남편을 대신해 정 할머니는 대구도립병원에 취직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억척스럽게 살다보니 대구에서 꽤 큰 광명서적을 운영하며 2남3녀를 키웠다.

정 할머니의 남편인 김명관 옹은 술만 먹으면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의주군지(義州郡誌)를 끌어안고 살았다. 살아생전 의주농업학교 졸업한 것을 훈장처럼 자랑했던 남편은 고향 땅 한번 못 밟고 9년 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을 때마다 정 할머니는 적십자사 직원으로부터 “기다리라”는 말만 들었을 뿐 상봉자 명단에 포함된 적이 없다. 장모의 속상한 마음을 알기에 사위인 충북대학교 이만형 처장은 사설업체를 동원해 북에 있는 가족을 수소문 한 적도 있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만형 처장은 “장모님이 어린 시절 수학여행을 단둥으로 갔다는 말을 하시기에 지난해에는 추억을 선물하고 싶어 중국을 모시고 갈 생각을 했었다”며 “북한과의 왕래가 자유로워진다면 장모님과 장인어른 사진을 들고 철산, 강계, 의주를 구경시켜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정 할머니는 “아이를 낳고 시댁으로 떠나던 날 몸조리를 제대로 못 해줘 미안하다며 눈물을 훔쳤던 친정엄마가 아직도 싸리나무 울타리 앞에서 기다릴 것 같다”며 “북한을 갈 수 있다면 고무줄놀이를 하며 뛰어놀던 학교도 보고 싶고, 부모님과 오빠, 조카들이 살고 있었던 강계 집에 가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금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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