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을 넘은 고구려의 기상 서린 장미산성
백두대간을 넘은 고구려의 기상 서린 장미산성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5.09.2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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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강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서린 흔적들이 많다. 남한강과 금강이 어우러져 흐르는 충북은 역사와 문화의 보고라 할만하다. 탄금대교를 지나 남한강을 따라 가는 길은 중원문화의 향기가 가장 진하게 피어나는 곳이다. 강을 따라 문화의 꽃이 피었으니 강 주변 발길 닿는 곳이 모두 문화유산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장미산성과 가까운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중원고구려비가 있고 성을 옆에 두고 잣고개를 넘어 만나는 가금면 봉황리 햇골산 마애불상군이 있어 일찍부터 고구려와 관련한 유적의 중심지로 주목되던 곳이 장미산성이었다.

6세기 중엽이 되면 고구려는 안팎으로 국난에 시달리게 된다. 안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귀족들 간의 싸움이 거듭되고 있었고 밖으로는 북방에서 새로 일어난 돌궐이 국경을 위협하고 있어 한강유역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이때 충주 지역의 지배권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넘어가게 된다. 고구려는 북의 돌궐을 제어하고 남의 강성한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자신의 땅을 점령한 신라와 비밀리에 동맹 관계를 맺는다. 동맹에 대한 대가로서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인정하게 되고 훗날 이 지역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신라와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싸움을 하게 된다.

한강을 이용한 수로 교통과 육로 교통은 장미산성 아래를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고갯길을 넘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신라는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이곳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 장미산성은 백제에서 고구려로, 고구려에서 신라로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장악한 세력의 깃발이 올려지게 된다.

장미산성은 고구려와 많은 관련을 맺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고구려의 유물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뚜렷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산 아래 고구려의 세력이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을 알려주는 비인 ‘충주고구려비’가 발견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건흥5년명 금동불입상’이 나왔다. 이러한 사실들로 장미산성이 고구려의 남하세력의 한 근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미산성은 성벽이 골짜기를 싸고 있는 형태인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의 전체길이가 2940m나 되는 제법 큰 규모의 성이다. 성을 쌓을 때에 성벽 아래쪽에 별도로 기단을 만들지 않고 암반층이 있는 산의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성 돌은 적당한 크기로 잘 다듬어 쌓았는데 신라에 의해 축성된 단양의 적성과 온달산성, 보은의 삼년산성은 널판같이 뜬 돌인 판석을 이용해 성을 쌓았으므로 성을 쌓는 면에서 이 산성과는 차이가 나고 있다.

장미산성 위에 서면 백제와 고구려가 이 성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느낄 수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답사에서는 반드시 새겨야 할 말이지만 산성답사는 미리 안내서를 읽고 가야 산성다운 산성을 만날 수 있다. 알고가면 장미산성에서 백두대간을 넘은 고구려의 기상과 삼국의 항쟁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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