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의 노래
가을밤의 노래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9.2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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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일 년 사계절 중에 밤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아마도 가을일 것이다. 그러면 가을밤은 다른 철의 밤과 무엇이 다를까? 달이야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라도 뜨고 지지만, 유독 가을밤에 그 모습이 돋보이는 이유는 다른 계절에 비해 부쩍 맑은 하늘 때문이리라. 여기에 가을 특유의 이슬이 더해져서 가을밤은 그 아름다움을 형성한다. 물론 여기엔 사람들의 심리적인 측면도 많이 작용할 텐데, 예를 들면 외롭고 쓸쓸한 감정의 상승 같은 것이다.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의 눈에 보인 가을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 가을밤의 노래(秋夜曲)

桂魄初生秋露微(계백초생추노미) 달은 막 떠오르고 가을 이슬 촉촉한데
輕羅已薄未更衣(경나이박미경의) 비단옷 엷어도 아직 갈아입지 않았다
銀箏夜久殷勤弄(은쟁야구은근농) 은쟁을 밤 깊도록 사무치게 켜면서
心怯空房不忍歸(심겁공방부인귀) 마음속으로 빈방 두려워 차마 돌아가지 못하네

※ 전설에 따르면 달에는 계수나무가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을 일컬을 때 계수나무를 집어넣어서 부르곤 했는데, 계백(桂魄)도 그 중 하나이다. 계수나무 그림자를 뜻하는 이 말은 달의 그림자 부분이 또렷하게 보이는 가을 달에 썩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계백(桂魄)이 이제 막 떠올랐다는 것은 가을밤 향연(饗宴)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序幕)이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달의 조명과 함께 풀잎에 내려앉은 이슬이 그 청초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은 밤이 깊지 않은지라 이슬은 살짝 촉촉한 정도였지만,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달과 이슬, 가을밤의 정취가 가득한 가운데, 시의 주인공은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림에 지난 여름부터 입어왔던 얇은 비단 여름옷을 철이 바뀌었음에도 아직 갈아입지 않았다. 그만큼 가을은 예고 없이 어느 새 와 있었던 것이다.

이 시의 주인공은 여성으로 집을 떠난 남편이 오기만을 차일피일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오랜만에 있을지도 모르는 남편과의 만남을 위해 입었던 여름 비단 옷을 내내 벗지 않은 채, 가을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아낙의 모습에서 그 기다림의 간절함이 어떠한지가 여실히 엿보인다.

그런데 주인공이 있는 곳은 한밤임에도 방 안이 아니다.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 아침나절에 올랐던 누대(臺)에 여전히 머무르면서 청아한 모습의 은빛 쟁(銀箏)을 우아하면서도 조용하게 켜고 있었던 것이다.

가벼운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은 것이나 은빛 쟁(箏)을 우아하게 켜는 것이나 모두 곧 돌아올 것 같은 남편을 의식해서이다. 그리고 밤이 되어 날이 차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방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남편 없이 홀로 밤을 지새워야 할 텅 빈 방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모두가 밝은 달과 촉촉한 이슬로 장식된 가을밤의 정취가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의 마음에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가을밤은 잠들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하늘에 뜬 휘영청 밝은 달과 촉촉하게 풀잎을 적시는 이슬이 외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상사(相思)의 병을 도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 상사(相思)의 병을 도지게 한 가을밤의 밝은 달과 촉촉한 이슬은 동시에 이 병을 치유하는 치료제이기도 하다.

멀리서나마 밝은 달과 촉촉한 이슬을 매개로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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