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말거라
걱정 말거라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9.20 19: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 이수안 <수필가>

구월에 들자 하늘은 더없이 높푸르다.

근년 들어 몇 해째 이어지던 가을장마를 생각하면 선물 같은 나날이다. 아침저녁으로는 겉옷을 입어야 할 만큼 쌀쌀해져 가을 깊숙이 들어온 느낌이다.

짙어만 가던 초록도 이제는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우거진 녹음으로 싱그럽기만 하던 가섭산도 점점 초록빛이 바래고 우리 과수원의 복숭아나무 잎새도 윤기를 잃어간다. 구멍 숭숭 뚫린 채 지친 표정의 잎새도 더러 보인다. 비바람에 시달리고 병해충과 싸워 온 흔적이다. 상처 하나 없이 여름을 잘 보내고 짯짯하게 잘 야문 잎새들도 많은데 어쩌다 저리되었을까.

잘 살펴보니 이유가 있다.

우리 과수원은 아래 밭보다 한 길 남짓 높은데 그 경계 부분에는 바람이 몹시 들이친다. 그쪽 나무들이 바람을 많이 타 복숭아나무에 치명적인 세균성구명병이 발생해 상처가 생긴 것이다.

바람을 한풀 꺾으려고 방풍망까지 쳤는데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주인이 심은 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나무의 운명이 애잔하다.

바람이 좀 순하게 불어준다면야 좋겠지만 그런 요행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저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강해지지 않으면 지고 만다. 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이 아닌가. 바람막이가 된 내가 죽음으로써 안쪽의 나무들이 다소 안전해진다면 그도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바람맞이 쪽 나무 입장이 어쩌면 한국 포도의 입장과 저리도 흡사한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포도는 이제 계절과 관계없이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되었다. 사철 내내 엄청난 양의 포도가 수입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최근 몇 해째 생산비도 못 건지게 되자 포도 농가의 주름이 전에 없이 깊어졌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포도원을 폐원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아직 정확한 집게가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도 충북도내 포도 농가의 15%가 폐원을 신청했다는 소식이다. 한·칠레 FTA 체결 때보다 4배나 많은 농가가 포도농사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국내 포도의 생산 기반이 위축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 많은 농사꾼은 이제 어떤 농사에 발을 들여놓게 될까. 그 때문에 생산 과잉이 되어 피해를 보게 될 농사는 무엇이 될까.

나는 포도농사를 정말 좋아했다. 30년 넘게 포도농사를 지어왔는데 작년에 포도원을 많이 줄이고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포도나무를 자르던 날을 생각하면 그때의 통증이 재발하고는 한다. 시대를 향한 원망, 그 싱싱한 나무를 자르는 비정한 마음, 변절자로서의 남은 농사꾼들에 대한 미안함 등 온갖 복잡한 마음이 뒤엉켜 끝내 감정의 둑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심은 복숭아나무인데 바람맞이 쪽 나무들이 지난 계절의 온갖 바람에 시달린 것이다.

방풍망을 쳐도 끄떡 않을 만큼 바람의 기세가 사납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쪽에서 더 두터운 장벽을 치는 수밖에. 내년에는 방풍망에 차광망까지 덧대어 바람의 기세를 기어코 꺾어놓으리라.

‘걱정 말거라. 비록 FTA라는 고약한 바람에 포도농사의 의지는 꺾였지만 너희는 외풍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해 주마.’

투명한 날씨에 가을볕이 여과 없이 내리쬔다. 주인의 마음을 알았는지 복숭아나무들도 여름볕 부럽지 않은 가을볕을 원 없이 즐기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