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가산 보살사
낙가산 보살사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5.09.1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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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청주의 동쪽을 병풍처럼 감싼 낙가산 기슭에 오롯이 자리하는 보살사는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천오백 년 고찰이다. 상당산성에서 남쪽으로 뻗은 낙가산은 해발 475m로 관음보살이 머문 인도 남부 보타낙가산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순리로 보면 관음도량인 보살사가 있으므로 후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낙가석조(迦夕照)는 낙가산의 저녁노을을 표현한 것으로 조선시대 서원8경의 하나였다. 보살사에서 낙가산에 오르는 길은 가파르나 용정동이나 용암동 쪽에서는 상대적으로 완만하다. 그러나 정상부근은 평평하게 이어져서 평정봉을 연상하게 하는데 여름의 남서풍과 겨울의 북서풍이 부딪치는 곳이라 바람이 비교적 세다. 

보살사에 대한 문헌기록은 조선초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처음 보인다. 이 책에 기록된 청주의 사찰 중에서 법등이 꺼지지 않고 지금에 이르는 절은 보살사가 유일하다. 이후 여지도서에는 보살사가 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10리 떨어져 있으며 편호는 25호이고 남자 47명이 있다고 하여 보살사를 중심으로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사의 창건은 조선시대 지리지의 기록보다는 훨씬 오래되었다. 현재 경내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석불을 통해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음이 입증된다. 한국사찰전서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28년(567)에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혜공왕 14년(778)에 진표율사의 제자 융종대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 태조 천수 1년(918)에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증통국사가 세 번째 중창하고, 예종 2년(1107)에 자정국사가 네 번째로 중창하였으며 그 후 조선 인조 5년(1627)에 벽암대사의 제자 경특이 다섯 번째로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오늘날의 보살사는 경특 스님이 이루어낸 것이나 다름없다. 경특은 보살사에서 벽암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았고 남한산성의 총섭 팔도승교령 승부(僧副)로서 산성축조 일을 하다가 보살사에 돌아와 말년을 지내면서 중수를 마무리하였다. 인조 27년(1649)에 주상과 왕비와 세자의 무병장수를 위해 제작한 영상회괘불탱에도 시주자로 경특 스님이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 불교가 억압되고 더욱이 전쟁을 겪으며 그 생명을 잃어가던 시기에 경특은 청주에서 큰스님으로 활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살사중수비의 명(銘)에서도 ‘푸른 산은 이지러지지 않고 푸른 물은 길이 흘러/법륜이 항상 돌아 왕성함에 그침이 없네/어찌하여 그치지 않아 그 갖추어진 것이 이어지는가/영원토록 길이 번창하여 무량수에 짝하리라’라고 하여 ‘꺼지지 않는 법등’을 말하고 있다. 

이밖에 여지도서에 보살사금구가 소개되어 있어 주목된다. 경신년(1740년 추정) 8월에 고을 사람이 땅을 파다가 옛 종을 습득하였는데 ‘대안(大安) 6년 용두사(龍頭寺) 금구(錦口)’라 새겨져 있으며 그 제작 수법이 기묘하고 소리는 수 리 밖에서도 들린다고 하였다. 국보 41호 용두사철당간이 남아있는 바로 그 용두사에서 사용하던 금구가 수백년 후에 우연히 발견되어 보살사에서 사용하였음을 알려주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현재 보살사에는 본전인 극락보전(유형문화재 제56호)을 비롯하여 명부전 삼성각이 있고, 극락보전 안에는 보물 제1258호인 보살사 영산회괘불탱, 석조이존병립여래상(유형 제24호)과 소조삼존불상, 후불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극락보전 앞에는 오층석탑(유형 제65호)이 반듯하다. 극락보전 뒤에 있었던 사적비는 1988년에 절 입구로 이전하려다 파괴되어 슬그머니 땅속에 매몰하였는데, 반드시 다시 꺼내어 복원해야 할 것이다. 산모퉁이 돌아 고즈넉하게 자리한 보살사는 시내에서 5분 거리에 있지만 깊은 산중의 절처럼 언제나 조용하고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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