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
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5.09.1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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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이영숙 <시인>

새색시 볼에 잡힌 홍조처럼 불빛 든 단풍들이 하나 둘 편지처럼 다가오는 가을이다. 지난주 집안 결혼식이 유성의 한 웨딩하우스에서 있었다. 신랑 신부 측 친가와 외가의 직계 사촌 백여 명과 신랑 신부 친구 삼십 명 정도의 소수정예로 단출하게 진행한 예식이다. 주례 없는 예식이 낯설지 않지만, 양가 어머니들의 정장 차림과 신랑 신부의 편지글 형식의 혼인서약이 이색적이다. 신부 측 가족의 피아노 연주와 축가를 끝으로 십여 분의 간단한 예식이 끝나자, 식장 내 원탁에 하나 둘 음식이 놓이고 신랑 신부가 하객들에게 돌아다니며 덕담을 듣는다.

우리 쪽으로 다가와 씩 웃는 조카에게 덕담보다는 “결혼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두 사람이 함께하는 길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다른 성향으로 살아온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인데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흡수되는 형국은 폭력일 수밖에 없다.

소와 사자 부부가 있다.

둘은 어느 날 더는 함께 살 수 없다며 법정에 섰다. 판사는 혼인을 유지할 수 없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소는 자신이 아끼는 풀을 주었는데 사자가 먹지 않았다고 말하고, 사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고기를 주는 데도 소가 불평했다고 말한다.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문제점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주었다는 데 있다. 즉,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파국이다.

두 사람이 하나 되는 길이라는 덕담은 가부장적 질서 아래의 폭력적인 일이다. 선녀가 나무꾼을 떠나 하늘로 간 이유는, 선녀의 정체성이 하늘이기 때문이다. 나무꾼이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서 선녀를 땅의 사람으로 살게 하는 행위를 효로 볼 문제는 아니다. 물론 첫째 불행의 원인은 사슴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슴이 나무꾼에게 선녀의 날개옷을 훔치라는 잘못된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런 불행한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원인은 잘못된 방법을 알고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선녀를 불행에 빠트린 나무꾼에게 있다.

소와 사자처럼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상대를 불행하게 하는 일이 결코 먼 데 있지 않다.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서 비일비재하다. 내가 행복한 일이 상대도 행복한 일일 때 그 길이 부부 금실의 바로미터일 것이다.

예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이 내게 자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식물로는 토마토요, 동물로는 박쥐라고 했더니 갸웃거린다. 과일로도 먹고 채소로도 먹는 것이 토마토요, 날아다니는 새이기도 하고 네발 달린 짐승으로 포유류도 되는 박쥐이니 의역하면, 상황에 따라 아내 하는 일을 잘 동조해주는 자상한 남편이라는 의미이다.

부부 사이에 자존심을 세우며 힘겨루기하는 일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입 서비스로 상황이 밝아진다면 말 부조만큼 쉬운 일이 또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거리인 부부, 정으로 곰삭은 오랜 시간이 남남 사이의 긴 터널을 종이 한 장의 경계로 좁혀 놓는다. 잘 익은 사랑은 미운 정, 고운 정 뜸 들이며 시간과 함께 농익어 간다. 서로 아이덴티티를 존중하며 두 사람의 간극을 좁혀 가는 그 길이, 소와 사자가 행복하게 사는 길이며, 선녀와 나무꾼이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이야기로 남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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