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잃은 은퇴
날개 잃은 은퇴
  • 임현택 <수필가·사회복지사>
  • 승인 2015.09.15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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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수필가·사회복지사>

연녹색이파리가 온산을 뒤덮을 때면 백로는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놓는다. 꽃내음 일고 낙엽이 지는 날까지 우리나라에 번식하며 머무는 철새, 천연기념물이기도 하지만 백로는 희고 깨끗함의 상징뿐만 아니라 청렴한 선비로 상징된다.

세상 이치에는 양면성이 있는 법. 아름답고 유혹적인 여인처럼 우아한 백로, 이면에 아픔이 있었다. 자연보호로 울창한 숲이 이루어지면서 곳곳이 백로서식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길조의 상징인 백로가 집단 군락을 이루면서 어느 순간 사람들은 길조의 반가움보다는 외면하기 시작했다.

청주에 모 중학교가 백로로 인하여 고충을 호소했다. 급식소에 백로의 날개와 먼지가 방충망을 뚫고 들어와 실내까지 점령한단다. 백로 떼의 울음소리조차도 소음으로 방해되며, 개체 수가 급증하면서 배설물로 인한 악취로 학생들이 수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결국 간벌을 했다. 백로의 서식지가 일부 무너지면서 집을 잃은 백로는 창공을 떠돌고 있었다. 새들의 영역 다툼 때문에 보금자리 마련하기도 만만찮을 텐데 찬바람이 불 때까지 어디에 정착할까? 백로가 간벌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부초 같은 신세가 될까 괜스레 염려가 된다.

백로문제가 한참 이슈이던 요즘 문학동아리에 참석했다.

목표달성, 승진 내지는 사업번창에 몰두하면서 바쁘고 지친 현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직장인들의 로망이다. 그중 연거푸 입에 술잔을 털어 넣는 한 분, 온갖 단체장을 역임하면서 명성을 떨쳤던 분이었다. 늘 사업에 쫓기다시피 바쁜 일상을 보내며 한 잔술로 피로를 위로하면서 행복했단다. 막상 사업장을 아들에게 승계하면서 은퇴 아닌 은퇴를 하니 묘하더란다.

은퇴, 맡은 바 직책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서 한가로이 지낸다는 뜻이다.

뜸하던 산행, 낚시도 시간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도 다녔다 한다. 그러나 서류상 나이로 은퇴이지 신체와 정신세계는 누구보다도 건강한 중장년층, 은퇴 후에도 활력이 넘치는 나이이지만 등 떠밀려 밀려나는 꼴이 되었다 한다.

어느 순간 스포츠 채널고정 밤, 낮 없이 리모컨 맨이 되어 있는 자신, 날개 부러진 은퇴생활로 일그러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단다. 규칙적인 일상생활이 무너지면서 갈 곳이 없어 우울하고 욕망과 열정이 충만했던 현직생활을 뒤돌아보니 마음조차 둘 곳이 없이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수초와 똑같더란다.

백로의 울창한 소나무 숲 서식지는 사회생활의 전성기시대이고, 간벌하고 어디론가 떠도는 백로는 은퇴 후 갈 곳 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본인의 모습이란다.

수면에 떠다니는 부초처럼 마음 둘 곳 없는 외로운 은퇴자의 모습이 백로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게 겹친다. 화려한 은퇴인 줄 알았다. 백로의 화려한 날갯짓이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을 줄 알았는데 어떤 이에게는 민폐가 된 것처럼, 은퇴로 인해 자신의 마음은 가족에게 왠지 모를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단다.

부리로 깃털을 다듬어 백로장식 깃을 펼쳐보이며 아름다움을 뽐내던 백로, 몸도 마음도 따뜻한 곳을 찾아 이동하는 철새, 철새인 백로가 무리지어 군락을 이루며 다음해에 다시 찾아올까? 혹시 울창한 숲이 사라졌기 때문에 백로 스스로 외면하지는 않을까. 은퇴 후 의기소침해진 그 모습과 닮지는 않았나. 물음표도 던져본다.

현직, 그보다 더 길게 남은 은퇴 후 생활도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처럼 백로의 멀어져간 보금자리 서식지가 자꾸만 아프게 눈에 밟히는 날이다.

은퇴 후 멀기만 한 노년의 시간, 날개 부러진 백로가 아닌 힘찬 도약을 하는 백로의 비상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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