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우산
고장 난 우산
  • 임정숙 <수필가>
  • 승인 2015.09.1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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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정숙 <수필가>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출근하려던 딸이 투덜댄다. 아끼던 우산이 망가졌다는 거다. 보나 마나 엄마 손을 탔을 거란다. 색깔이 화사하니 눈에 띄어 몇 번 쓰고 나간 기억이 있으니 발뺌은 못 하겠다. 우산살 끝과 천 매듭이 하나 풀어져 있을 뿐이었다. 실로 꿰매어 놓으니 멀쩡하다. 

새 우산 하나 사는 일도 쉽지 않았던 어렸을 적, 비 오는 날 아침은 우산 전쟁이었다. 자칫 게으름을 피우다간 학교에 갈 때 제대로 된 우산을 쓰고 가긴 희박하다. 

성한 우산을 차지하려고 육 남매가 경쟁하다 밀리면 처량한 꼴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우산살이 반쯤 펴지다 말거나 한쪽이 기울여져 반달모양인 채 쓴 모습은 우스꽝스러워도 어쩔 수가 없다. 비닐우산이라도 눈에 띄어 급히 들고나가다 보면 얼마 못 가서 낭패다. 거센 비바람에 훌렁 젖혀져 버리면 그만이다. 젖은 몸인 채 수업을 받으며 곤혹스러웠던 적도 더러 있었다. 

어린 시절 기억 중에 흑백사진처럼 간혹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비가 잦고 햇볕 쨍쨍한 여름 날씨면 할아버지가 대청마루에서 삼베 적삼을 입고 돋보기안경을 쓰고 우산을 고치셨던 모습이다. 잡음 섞인 라디오도 종일 틀어놓으셨다. 비 오는 날엔 어머니가 준비한 애호박과 풋고추가 들어간 따끈한 장떡에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이며 우산을 매만지셨다. 3대가 함께 산 대가족이었으니 집안 처마 밑 벽마다 쓸 만한 우산이 풍족하게 걸렸던 건 할아버지의 부지런한 손길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연장 도구 상자를 펼쳐 놓고 망가진 우산을 살필 때는 꼭 의사 같았다. 어디를 수선해야 할지 이리저리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것까지도 늘 익숙한 광경이었다. 진단이 내려지면 나름의 처방이 시작된다. 할아버지의 그 섬세한 눈썰미와 노련한 솜씨로 손색없는 우산이 다시 만들어질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재미와 감탄스러움이 느껴졌다. 

돌이켜보니 어딘가에 버려진 우산을 보면 할아버지는 꼭 주워 오셨다. 물론 상태에 따라 고쳐 쓸 요량도 있었겠지만 우산 부속으로 사용하려는 의도였다.

이젠 무엇이든 흔한 세상이 된 건 맞다. 더 좋은 것, 비싼 것, 새로운 것에 가치를 둔다. 그래서 쉽게 사고 쉽게 버리기도 한다. 우산 고치는 값으로 새로 하나 장만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다시 사고 고쳐 쓰자니 고치는 법도 모른다. 이젠 더는 우산 고쳐주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언제까지 물자가 무한정 넘쳐날 순 없다. 지나치게 사고 버리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쓰레기로 넘쳐나고 이를 처리하기 위한 비용과 우리가 치러야 할 환경적 대가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인명이 재천이듯이 물건도 제 생명을 다할 때까지 소용되어야 한다. 마르고 닳도록 쓰는 옛 어르신을 보면 존경스럽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나의 할아버지는 동네 깐깐한 선비로 통했다. 성품이 과묵하고 대쪽 같으셨다. 지적이고도 날카로운 눈매의 할아버지가 중절모에 두루마기를 입고 대문을 나서면 광채가 났다고 한다. 단돈 몇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물건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검소한 철칙으로 사신 할아버지의 평소 위용과 절제의 인품이 그립다. 

딸에게 고친 우산을 넘겨주며 다시 쓸 수 있다 하니 의심부터 한다. 한 번 고장 난 우산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물질을 더 숭상하는 인스턴트 시대의 아이들 앞에서 할아버지 이야기는 이젠 골동품쯤 돼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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