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 대한 효(孝)보다 더 중요한 것은(3)
부모에 대한 효(孝)보다 더 중요한 것은(3)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9.13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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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1594년 겨울 경상병사 김응서가 진중에서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만나 그 사정을 상세히 듣고는 조정에 알리니 선조도 감탄하여 특관 두사충(杜師忠)을 보내 전국에 명당을 잡으라 시키니 청주 가포곡에 장지를 정하고, 왜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가마에 관을 실어 청주로 옮겨 장례를 지냈다.

부산진과 동래성을 점령한 왜적은 세 길로 북상했다. 이일과 신립이 각각 상주와 충주에서 반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참패하고 20일만에 한성은 함락되고 만다. 결국, 선조는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가고 왜적의 북상은 계속 된다. 그러나 명의 구원군이 합세해 평양성을 탈환하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유격전으로 적의 보급로를 교란했으며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의 수군이 바다를 통한 왜적의 작전을 완벽히 차단하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결국 협상 끝에 주력군은 철수하고 몇 년간 경상도 지방에서 질질 끄는 상황이 펼쳐지다가 1597년 협상은 파기되고 14만의 병력이 다시 쳐들어오게 된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이번에는 전라도 등 남부지방을 석권하고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까지 점멸시키며 북진하게 되지만 점점 강해지는 반격과 이순신의 명량대첩 등으로 밀리던 중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1598년 7년간의 전쟁은 종료된다.

송상현의 부친은 전북 고부 사람이고 송상현이 태어난 곳도 부친의 근무지였던 서울 황화방(위치가 정확지 않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청주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송상현의 묘가 청주 수의동에 있는 것은 풍수와 관련이 있다. 송상현의 묘는 임란이 끝난 후에도 동래성 동문 밖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를 전해 들은 선조는 당대 제일의 풍수가였던 두사충에게 명당을 잡도록 했던 것이다. 이장 당시 왜군의 점령지였던 동래에서 어떻게 왜군의 허락을 받아 이장했는지는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아마 왜장도 송상현의 충절을 존경하여 이장을 허락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묘가 이장 되고 송상현의 부인이 3년간 시묘살이를 했고 이때부터 여산 송씨가 세가를 이루게 됐다. 

조선은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구와 농지가 감소되었으며, 재산 손실도 컸다. 국보급 문화재도 많이 소실되었고 책과 공예품, 미술품 등도 대량 약탈당했으며 명의 원조로 숭명사상이 강화되어 호란의 원인이 됐다. 또한, 일본은 조선에서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공예품과 인쇄술이 발달했고 서적의 약탈로 성리학이 전파되어 학문이 발달했다. 도공을 포로로 잡아가서 도자기 업이 발달하였으며 임란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바쿠후가 시작된다.

송상현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그가 왜적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가 순절한 동래성이 있고 나라에서 세운 부산 충렬사가 있다. 이 밖에 그를 봉향하는 사우가 전국 여러 곳에 있다. 송상현의 유적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곳은 청주시 흥덕구 강상로 18번 길 44번지에 묘소와 신도비, 그리고 충렬사와 천곡기념관이 있다. 송상현 충렬사를 향하는 길 입구에는 그의 소실로 함께 순절한 한금섬과 이양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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