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으로 말리기
별빛으로 말리기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5.09.1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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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배낭 속에 원피스 두 개와 속옷 두벌, 그리고 선글라스를 집어넣었다. 머리를 감기 싫은 날을 생각해서 질끈 동여맬 고무줄도 잊지 않았다. 가장 최소한의 짐을 챙겨 깃털처럼 가볍게 떠돌고 싶었다. 마치 내게 찾아온 마지막 여름인 양 마음껏 쏘다녔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를 돌고 담양의 죽녹원 김제의 벽골제, 전주의 덕진공원을 헤매며 여름 속을 서성였다. 잠시 나를 잊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오롯이 혼자가 되어 거닐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지퍼를 채우듯 철길을 달리는 기차를 보며 생각한다. ‘다시 올 수 없는 나의 정처 없었던 여름아 안녕!’ 그리고 기억들을 배낭 속에 꾹꾹 눌러 추억의 지퍼를 닫아버렸다.

돌아와서 듣는, 내 작은 집 처마 밑의 풍경소리가 좋다. 아득하게 퍼져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난 왜 말레이시아의 길고양이가 떠오를까? 그 가릉거리던 유혹의 소리가. 이번 주는 고요하게 묻혀 지내리라. 텃밭으로 갔다. 방울토마토가 붉다. 아무도 돌보지 않았는데 홀로 익어가는 것이 기특하다. 보라색 가지도 주렁주렁 달렸다. 얼갈이는 구멍이 숭숭 나서 얼갈이인지 가을 낙엽 뼈대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자연이 주신 선물이니 고마운 마음으로 딴다. 소파에 누워 방울토마토 그 탱탱한 붉은 알을 집어든다. 동네를 내려다보며 누운 채 입에 넣는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에 햇볕이 짱짱하게 내려오고 있다. 아깝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어떤 시인의 말처럼 내 눈에도 그 아까운 햇볕이 들어왔다. 여름내 돌아다니기만 하는 방랑기 많은 주인을 만나 햇볕을 맞아볼 겨를도 없이 눅눅한 냄새가 피어나는 이불과 세간살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햇볕을 품은 바람을 가득 넣어 주어야겠다. 벌떡 일어나 이불을 빨랫줄에 내다 널었다. 더 이상 널 빨랫줄이 없을 때까지 이불이란 이불은 죄다 널었다. 주인 없는 집의 습기와 어둠이 슬며시 자리 잡은 서랍장도 낑낑거리며 날랐다. 어느 틈에 젖어서 곰팡내가 폴폴 나는 작은 가구도 내다 넌다. 작은 방에 깔아두었던 돗자리는 곰팡이가 여기저기 피었다. 락스를 수건에 적셔 구석구석 닦아보지만 회생 불가할 듯하다. 일단 마당의 넓적한 바위에 널어놓는다.

발코니에 내어 놓은 식탁은 울룩불룩하다. 집을 비운 사이에 비의 습격을 받은 상판이, 젖고 마르고를 반복했는지 제 형태를 잃어버리고 울고 있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상판 위에 타일을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어릴 적 엄마가 화장실과 마당의 수돗가에 조각 타일을 붙이시던 장면이 떠올랐다. 창고를 뒤져보면 공사하고 남은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았다. 창고 문을 열었다. 타일이 있었다. 욕실 공사를 하고 남은 재료인 듯했다. 타일용 하얀 시멘트를 개서 식탁 위에 덮었다. 그리고 얇게 펴 바른 후 그 위에 타일을 올렸다. 타일을 일부는 가로로 일부는 세로로 붙였다. 그래도 남은 공간에는 타일을 망치로 깨트려 조각조각 붙였다. 제법 그럴싸하다. 집안 구석구석을 정돈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후련했다.

어느덧 어둑한 산 그림자가 마당 가득 내려왔다. 커피를 타고 식탁에 초를 밝혔다. 저녁별이 잔 속으로 떨어지는 듯하다. 제법 싸늘해진 밤바람을 몸에 감으며 마시는 커피가 향기롭다. 말레이시아의 태양 아래 홀로 자신을 말리던 길 고양이의 노릇한 털빛이 커피 향을 타고 아득하게 떠오른다. 나도 여행에 지쳐 눅눅해진 마음을 별빛 아래 바싹 말려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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