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의 중심이 된 탄금대
아픈 역사의 중심이 된 탄금대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5.09.0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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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탄금대 토성은 충주에서 서북쪽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곳에 있고, 비교적 넓은 들 끝자락에 솟아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탄금대 토성은 한강을 앞에 두고 인공적인 해자를 둔 서울의 풍납토성,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을 끼고 해자를 둔 몽촌토성, 금강을 마주하고 선 공주의 공산성, 그리고 미호천을 해자로 두었던 청주의 정북토성과 같이 물을 앞에 두고 야트막한 구릉 위에 조성한 토성이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의 하나였던 해자가 자연적으로 둘러 있어 요새 중의 요새였다. 지금은 성 앞에 있었던 자연적 해자인 샛강이 다 메워져 그 옛날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이곳은 사실상 섬이라 할 수 있다.

탄금대라는 이름은 신비의 고대사인 가야사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신라의 역사 속에 가야금을 배경으로 나타난다. 신라가 한강 유역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던 시기에 가야는 오히려 백제의 편에 서 있게 되면서 가야는 멸망이라는 비운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무너지는 가야를 뒤로하고 신라에 귀화하여 이곳에서 망국의 한을 가야금에 담아 연주했던 인물이 바로 우륵이다. 우륵의 선율은 한강 물길을 따라 흐르게 되었고, ‘탄금대’라는 지명도 가야금 금(琴)자와 연주 탄(彈)이 만나 이루어진 것이다.

백제는 바다를 통한 교역이 활발하였던 국가이다. 바다 건너 중국이나 일본에 진출하고 교역을 하면서 해상제국을 건설하였다. 바다로 연결되는 강은 백제의 주요한 교통로였으며, 초기 백제에 있어 한강은 백제 힘의 원천이었다. 이러한 백제를 탄금대에서 느껴볼 수 있다. 강 건너 쪽에서 탄금대를 바라보면 강과 바다를 누비며 교역을 하고 세력을 확장했던 백제의 숨결과 기상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탄금대 토성의 규모는 동북쪽에 자리 잡은 내성의 동서 길이 150m, 남북 길이 100m 정도의 불규칙한 타원형으로 되어 있고, 성의 둘레가 400m 정도인 작은 성이다. 열두대 쪽으로 난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쉽게 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성벽의 바깥쪽과 안쪽의 구분이 확연하게 나타나고, 길을 내느라 잘라져 나간 곳에서 점토질 흙과 강에서 나는 강돌이 다져진 성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은 옆으로 돌아가면서 이어지다 ‘신립장군순절비각’이 있는 곳에서 끊겨 있다. 비각을 세우느라 토성을 훼손하였다. 탄금대 전투에서 적절하지 못한 전술인 기마전과 배수진을 치고 왜적을 맞아 싸우다 패배한 신립장군과 조선관군의 아픔이 느껴지는 곳이다.

탄금대 산책길을 따라 들어가면 자연적인 언덕처럼 보이지만 이곳이 탄금대의 내성을 돌아보는 출발점이 된다. 안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일제강점기 저항시인 권태응 선생의 시비가 있다.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마나 자주감자, 하얀꽃 핀 건 하얀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감자”라는 일본식 성명 강요에 저항해서 지은 시 ‘감자꽃노래비’를 만나게 된다. 피어나는 꽃의 색깔이 곧 감자의 색깔이라는 자연의 진리를 통해 일제 일본식 성명 강요의 부당함을 시로 승화시킨 위대한 흔적이 이곳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탄금대는 토성과 그곳에 담긴 아픈 역사보다는 강과 어우러진 솔숲의 향기가 감도는 유원지로 더 잘 알려졌다. 때로는 아픈 역사가 더 생생하게 살아나 가슴을 아프게도 하지만 많은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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