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협화음
불협화음
  • 안희자 <수필가>
  • 승인 2015.09.0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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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수필가>

외손자는 여덟 살이다. 그 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후엔 거의 녀석과 함께 지낸다. 그런데 오늘은 숙제를 하다가 아이가 갑자기 떼를 쓴다. 아무리 달콤한 먹거리로 비위를 맞춰보지만 떼쓰는 아이를 달랠 수 없다. 고민 끝에 생각한 것이 동화책 읽어주기다. 지루함도 달래주고 정서적으로 교감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는 책을 읽어주면 오히려 짜증을 낸다. 어떤 때는 막무가내로 책을 빼앗아가 내던지기도 한다. 그때마다 적응하면 나아지겠지 싶어 참아주었는데 오늘도 그 일이 반복되니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자 아이가 울며 말한다.

“할미! 할미가 책 읽어주는 거 듣기 싫단 말이야.” 

순간 나는 귀를 막고 싶었다. 얼굴도 달아올랐다. 할머니 마음을 몰라주는 손자가 밉기도 했다. 화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 엄마가 준비해주고 간 음악 시디(CD)를 틀어놓고 돌아앉아 있는데 손자의 볼멘소리가 잠잠해졌다. 궁금해서 뒤돌아보니 곤히 잠들어 있었다. 새들의 지저귐을 담아낸 바이올린 연주곡 비발디의 ‘봄’이 아이에겐 달콤한 자장가였나 보다. 노랫말이 없어 언어로부터 자유롭고 경쾌한 리듬이 아이의 기분을 달래준 것 같았다.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손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손자를 위해 책을 읽어주겠다고 한 나의 고집스러움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불협화음이었는지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종일 학교에서 우리말뿐 아니라 낯선 영어까지 배우느라 힘들었을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 욕심만 앞섰던 것이다. 

‘불협화음’의 사전적 의미는 ‘둘이 상의 음이 울릴 때 심미적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아 조화롭지 않게 들리는 음’을 말한다. 돌이켜보니 내 인생의 만남 속에서도 불협화음이 많았던 것 같다. 

학창시절 나의 꿈은 교사였다. 하지만, 권위적이었던 아버지는 반대하셨다. 그것은 나에겐 절망적인 소리였다. 하지만, 언젠가 도전하리라는 꿈을 간직한 채 직장에 취업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생소하고 복잡한 서류처리며 야간근무까지 해야 하니 삶이 권태로웠다. 또 결재 때마다 들어야 하는 상사의 잔소리는 언제나 스트레스였다.

꿈이 좌절되면서, 나는 자주 음악다방을 찾아 팝송에 열광했다. 그때 팝송은 감미로운 선율로 내 가슴속으로 다가와 희망이 되었고 나의 아린 상처를 위로해 주었다. 그래서일까. 그 시절 나의 삶은 음악 빼고는 모든 게 불협화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결혼했다. 그러나 각자의 의견만 내세우다 보니 불협화음도 많았다. 출산 후 나는 맞벌이를 고집했다. 자아실현 때문에 아니, 어쩌면 돈벌이를 위해 내 목소리를 높였으나 남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돈 버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그 말이 몹시 서운했지만, 우격다짐으로 다투기보다는 수긍하고 아이들의 엄마로 열심히 살았다. 아이들도 잘 따라와 주었다. 그것이 나에게 큰 즐거움이자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불협화음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여길 때 빚어지는 것, 하지만 한 걸음 양보할 때 절묘한 하모니를 빚어낼 수 있지 않을까. 때로는 불협화음이 나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조화롭지 않은 음들 속에서 조화로운 음을 찾고자 노력했던 그 시절. 돌아보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빛이 나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이제 나만의 욕심에서 벗어나 아이의 마음을 먼저 읽어 주리라. 그렇게 여러 색깔의 소리를 조화롭게 맞춰가고자 노력할 때 손자와의 불협화음은 저절로 해결되며 아름다운 동행은 지속될 수 있으리라.

느긋한 오후, 녀석은 음악 속에서 여전히 곤하게 잠들어 있다. 무척 평온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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