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비
초가을 비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9.07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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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느낌이 들면 이미 가을의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낮 동안은 염장군의 기세가 여전해서 사람들은 가을을 실감하지 못한다. 

이 때 확실하게 가을이 왔음을 큰 소리로 알려 주는 것이 바로 가을비이다. 여름인지 가을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 한나절 쯤 비가 내리고 나면, 날씨는 선선하다 못해 싸늘하기까지 할 정도가 된다. 

이제는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가을 기운이 뚜렷하다.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도 초가을 밤비 소리를 듣고 가을이 왔음을 절감하였다. 

◈ 초가을 밤비(新秋夜雨) 

蟋蟀暮啾啾(실솔모추추) : 귀뚜라미 해 기울자 처량하게 울어 
光陰不少留(광음불소류) : 세월은 잠시도 머물지 않는구나. 
松檐半夜雨(송첨반야우) : 소나무 처마에 비 내리는 한밤 
風幌滿牀秋(풍황만상추) : 휘장은 바람에 흔들리고 침상 가득 가을이 앉았네 
曙早燈猶在(서조등유재) : 이른 새벽에도 등불 여전히 켜 있고 
凉初簞未收(양초단미수) : 처음 맞은 추위에 아직 발을 치우지도 못 했네 
新晴好天氣(신청호천기) : 날 개이고 날씨는 좋은데 
誰伴人遊(수반노인유) : 누가 늙은이와 짝이 되어 놀아줄까. 

※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지만, 아직 낮에는 실감이 나질 않는다. 

저녁이 되어 담장 밑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와야만 비로소 가을임을 느낄 수 있다. 

가을이 왔음을 직감한 순간 시인에게 떠오른 생각은 바로 세월은 무상(無常)하다는 것이었다. 처마 밑 귀뚜라미 소리로, 조금의 멈춤도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세월임을 새삼 깨달은 시인의 귀에 또 들리는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빗소리였다. 그것도 한밤에 소나무 처마로 내리는 비였다. 깊은 밤중이라서 처마 밑 소나무 가지를 때리는 빗소리가 더욱 또렷하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바람도 심상치 않았다. 

창문에 드리운 휘장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는데, 이 바람이 모시고 온 손님이 있었으니, 바로 가을이 그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어느새 침상 가득히 가을이 와서 앉아 있었다. 뜻하지 않은 손님의 내방(訪)에 시인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느라, 새벽녘까지도 등잔불은 꺼지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비는 그쳤는데, 비가 그치고 나니 갑자기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처음으로 찾아온 추위였는데, 아직 여름 더위를 피하느라 늘여 놓았던 방문의 발을 거두지도 않은 상태였다. 

초가을 비가 몰고 온 뜻하지 않은 추위였던 것이다. 비가 개이고 나자 날씨는 부쩍 맑아져 가을 기운이 물씬해졌지만, 시인의 마음에 밀려온 것은 진한 고독감이었다. 

귀뚜라미 소리로 가을이 왔음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그리 분명한 감각은 아니다. 

초가을 밤을 적시는 비가 내리고 나서야 사람들은 몸으로 가을을 느끼게 된다. 

느닷없이 찾아온 추위에 당혹스럽기도 하고, 부쩍 맑아진 날씨에 도리어 외로움을 타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초가을 비는 가을의 빛깔을 뚜렷하게 하는 물감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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