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아날로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5.09.07 1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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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영숙 <시인>

한때 논술 문제로 ‘빠름과 느림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를 다룬 적이 있다. 즉 빠른 것은 선이고 느린 것은 악인 것이냐는 문제이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걸어가야 보이는 것들도 있으니 느리다고 죄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빠름의 미학에 반하여 느림의 미학이 향수처럼 거론되고 있는 이때, 평소 알고 지내던 문우들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타이틀로 아날로그 여행을 기획했다. 젊은 날의 추억이 그리워 달걀도 삶고 오징어도 구워 배낭에 넣었다. 여고 시절, 수학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조치원역에 도착하니 벌써 일행들이 도착해 있다. 밤 12시 부산행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동트지 않은 새벽녘 부산역에 도착하여 제각기 준비한 간식으로 긴 시간의 피로를 풀면서 부산 기행을 기획했다.

태종대→이기대 트레킹→자갈치 시장→감천 마을→ 국제시장 코스를 구상하고 알차고 긴 일정을 마쳤다.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걸어 다니는 곳이 많아서 다소 힘들었지만, 살면서 놓친 부분들을 자세히 돌아본 하루였다. 

이기대 해안을 따라 생태식물에 관한 공부를 곁들이며 3시간 정도의 긴 트레킹을 마쳤다. 마침 식물과 동물도감을 꿰고 있는 생태 강사가 있어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 물봉선, 하늘타리, 계요등, 천선과나무, 댕댕이덜굴, 왕모시풀, 말오줌대, 갈고리밤나방애벌레, 12점박이별잎벌레…,

오륙도가 보이는 데끼리데이에 도착하여 땀범벅으로 민낯이 된 서로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웃음꽃을 피운 후, 수암골을 연상케 하는 감천문화마을로 향했다.

6.25 전쟁을 상기시키는 감천 문화 마을, 다닥다닥 개미굴처럼 이어있는 피난지를 구석구석 돌아보며 가슴을 쓸었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한반도, 세계화 시대에 아직도 동족끼리 총을 겨누며 집안싸움을 하고 있으니 서글픈 노릇이다.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 여우상 앞에서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청소년들, 그들에게 1950년대 한국전쟁은 윤흥길의 소설 <기억 속의 들꽃>처럼 아련한 일일 것이다. 수많은 들꽃 ‘명선’이를 만들어냈던 동족상잔의 비극, 성냥갑만 한 집과 손바닥만 한 현관문, 한사람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는 비좁은 골목, 그 중간중간 놓여있는 파란색 물탱크와 작은 연탄창고, 그 사이로 쥐바라숭꽃처럼 떨어진 들꽃 소녀 명선이 환영처럼 오간다. 

감천마을을 벗어나 다시 국제시장으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신 시인이 길바닥에 떨어진 십 원짜리 동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줍는다. 그리고 한동안 감천마을을 말없이 되돌아본다.

무박 2일, 7인의 문우들과 함께한 부산 기행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은 황금 여행이었다. 과속하는 시곗바늘을 붙잡아 두고 하루를 48시간으로 만들어 쓴 아날로그 여행, 비록 발바닥에 물집 잡히고 바닷가 독한 모기에 온몸이 벌집투성이지만, 아름답게 익어가는 중년의 멋진 날로 추억될 것이다. 

느림은 기억의 강도와 정비례하지만, 빠름은 망각의 강도와 정비례한다. 기차를 타고 걸어다니면서 고은 시인의 ‘그 꽃’을 아주 사랑스럽게 만났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

과속하지 않는 영혼과 흙내 나는 식물성 감성으로 살면서, 달팽이의 시선으로 느리게 보았던 ‘그 꽃’들이 다시 손짓하는 날엔, 바랑 짊어지고 기차역으로 달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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