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역사와 음주문화
술의 역사와 음주문화
  • 박상일 <역사학박사, 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5.09.03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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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 박상일 <역사학박사, 청주대박물관>

술은 알코올성분이 들어 있는 음료의 총칭으로 주세법에 알코올 도수가 1도 이상이면 술로 규정하고 있다. 전통적인 과실주나 곡물주를 비롯하여 현대의 화학주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주정음료는 모두 술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술은 거의 모든 민족이 즐겼으며 그 용도도 다양하여 굿이나 관혼상제와 같은 의례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항상 우리의 곁에 있어 왔다. 술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생각되어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면에서 ‘광약(狂藥)’이라고도 하였다. 술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여 정신과 몸을 해치고 가산을 탕진하기도 하고, 임금으로서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치게 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신주(亡身酒)’ 또는 ‘망국주(亡國酒)’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술은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던 선사시대에도 과실주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과실은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과즙이 나오고 과실 껍질에 붙어 있는 천연효모가 쉽게 번식하여 술이 된다. 보름달 아래 원숭이들이 바위나 나무둥지의 오목한 곳에 잘 익은 산포도를 넣어두고 그 위에서 뛰놀다가 다음 달 보름날에 다시 찾아와서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전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주몽신화에는 유화가 술에 만취된 상태에서 해모수와 잠자리를 하여 주몽을 낳았다 하고, 부족국가시대에 영고·무천·동맹 등과 같은 제천의식 때에 춤추고 노래하며 술을 마시고 즐겼다고 하니, 당시에도 음주가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시대 서원경 즉 지금의 청주 민정실태를 적은 ‘정창원문서’에도 청주·탁주·술지게미·예주(禮酒) 등이 기록되어 있어 술의 종류가 다양하였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보듯이 음주예절을 몹시 중시하고 주도(酒道)를 엄하게 지켰다.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고 하여 음주에는 장유유서를 반드시 지키고, 어른께 술을 권할 때는 정중한 몸가짐을 하여 두 손으로 따라 올린다. 오른손으로 술병을 잡고 왼손은 오른팔 밑에 대고 옷소매 또는 옷자락이 음식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여 따른다. 도포를 입던 옛날 술병을 든 오른손의 긴 소맷자락이 음식에 묻지 않도록 왼손으로 지켜 올려 따르던 예절이 양손으로 공손히 하는 주례가 된 것이다. 술상에 앉으면 대작하여 주거니 받거니 수작(酬酌)을 하고, 잔에 술을 부어 돌리는 행배(行杯)를 행한다. 이때 받은 잔은 반드시 비우고 되돌려주는 반배(返杯)를 하고, 반배는 가급적 빨리 이행하고 주불쌍배(酒不雙杯)라 하여 자기 앞에 술잔을 둘 이상 두지 않는 것이 주석에서의 예절이다. 

세시풍속에서도 술이 빠지지 않는다. 설을 맞이하는 술이라는 의미의 세주(歲酒)가 있고, 정월 대보름날에 마시는 귀밝이술(耳明酒)이 있으며, 봄철에는 청명주를 담갔다. 3월에는 여름을 무사히 지나기를 바라는 의미로 과하주(過夏酒)를 빚어 마셨다. 계절에 따라 빚은 술을 시양주(時釀酒)라 하는데, 정월 첫 해일(亥日)에 시작하여 3차에 걸쳐 해일에 담근 술이 삼해주이고, 정월 오일(午日)에 시작하여 4차에 걸쳐 오일에 담그는 사마주도 있었다. 모두 정성으로 빚었던 이름난 민속주다. 충북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청주 신선주, 충주 청명주, 보은 송로주가 있으니 추석선물로 좋을 듯하다. 제례에는 초헌 아헌 종헌 등 삼헌이 기본이고 제사 후에는 모두들 음복술을 마시는 것도 관례이다. 혼례에는 신랑 신부가 백년해로를 약속하며 마시는 합환주 또한 필수적이었으니 지금도 폐백실에서 전승되고 있다. 이래저래 술은 우리 생활의 일부임에 틀림없지만, 과음은 사람을 망치기도 하니 주례를 지켜 조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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