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만의 해후
46년 만의 해후
  • 김기원 <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 승인 2015.09.0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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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 김기원 <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지난 금요일 저녁 중학교 동창생들과 46년 만의 해후를 했다.

60대 초로가 된 동창들은 보자마자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얼싸안았고, 사춘기 까까머리 학생들이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어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있었다. 

1970년 1월 졸업 이후 처음 만남이라 모두들 감개무량했고, 자리에 앉자마자 15살 청소년이 되어 학창시절 이야기꽃을 피웠다.

육신은 나이테만큼이나 주름져있으나 마음은 아직도 중학생 이었다.

딸기코 교감선생님, 욕쟁이 체육선생님, 대머리 음악선생님, 예쁘고 청초했던 새내기 미술선생님 등 옛 은사들과의 추억과 기억에 남는 동창들의 근황을 주고받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필자는 혈연 지연 학연이 전혀 없는 충북도에서 공직생활을 했다.

60이 넘도록 그 흔한 동창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경상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 때 부모님 따라 전라도로 전학 가 그곳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동창회에 참석하기에는 공간적으로 너무 멀뿐만 아니라 동창회와 소통조차 하지 못해 동창애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민들레 홀씨 되어 외딴섬처럼 살았다.

동창회 총무들이 사무실을 순회하며 회비 걷는 모습과, 학교별로 세과시를 하듯 동창회를 하는 걸 보면 내심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더 강해져야 했고, 덕분에 그들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텃세 속에도 대과 없이 공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런 내게 어느 날 전화 한통이 왔다.

보현이었다. 신문에 실린 칼럼을 보고 전화했노라며 전남중학교 10회 동창이 아니냐고 물었다. 보현이는 꿈에도 잊지 못할 착한 친구였으므로 반갑기 그지없었다.

오래 살면 이렇게 만나게 되는 구나 싶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보현이가 서울지역에 사는 동창들이 소모임을 하고 있으니 시간나면 참석해달라고 했다.

그날이 바로 지난 금요일 저녁이었다. 

보현이의 전화를 받고 빛바랜 졸업앨범을 꺼내 모임에 나온다는 친구들의 면면을 찾아보았다.

그들은 어떻게 광주에서 중학교를 나와 서울에 살고 있는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할 46년의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만사 제쳐놓고 그들을 만나기로 했다. 거의 뜬 눈으로 전날 밤을 지새웠다. 

46년 만에 동창을 만나는데도 이럴진대 70년을 생이별한 이산가족들의 해후는 어떡할지 생각할 수록 가슴이 먹먹해지고 아리다. 

동창회는 동창들과 선후배들이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학연의 고리다.

좋게 보면 분명 미풍양속이지만, 조직 내의 패거리문화를 낳는 역기능을 하기도 해 동창회를 금지하는 기업과 조직이 늘어나고 있다. 

동창회는 초등학교 동창회와 고등학교 동창회가 압권이다.

시골 초등학교 동창회는 같은 마을에서 자라고 커서 더 애틋하고, 고등학교 동창회는 끈끈한 선후배 의식이 자리하고 있어서 이다. 

50대 이후들이 만나는 동창회 주제가는 단연 오승근이 부른 ‘내 나이가 어때서’이다. 내 나이가 어때서를 힘차게 부르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옛 추억을 더듬는다.

그러나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를 나이에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한 동창들도 많다. 아파서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더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도 있다.

또한 이런저런 사연으로 실의와 좌절에 빠져 동창회에 나오고 싶어도 못나오는 친구들도 있다.

하여 이 세상 모든 동창회가 지친 삶의 활력소가 되고, 소외된 친구들을 보듬는 비타민이 되었으면 한다. 

동창들이여 평화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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