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정취
초가을 정취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8.3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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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이십사절기 중 열네 번째 절기인 처서(處暑)를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이 있다.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것도 처서(處暑)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름철 극성을 떨던 모기가 차츰 기운이 떨어져 사라지고, 그 대신 귀뚜라미와 뭉게구름이 보이면, 이미 가을 문턱을 넘어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직은 낮은 여름, 밤은 가을인 반쪽 가을에 불과하지만, 가을은 가을이다. 이때를 일러 보통 초가을이라 칭하는데, 초가을은 그 나름의 정취가 있다. 당(唐)의 시인 맹호연(孟浩然)은 이러한 초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는 호사를 누렸다.

◈ 초가을(初秋)

不覺初秋夜漸長(불각초추야점장) 어느새 초가을 밤은 점점 길어지고
淸風習習重凄凉(청풍습습중처량) 맑은 바람 솔솔 부니 쓸쓸함이 더해가네.
炎炎暑退茅齋靜(염염서퇴모재정) 불볕더위 물러가고 초가집에 고요함이 감도는데

階下叢莎有露光(계하총사유로광) 섬돌아래 한 떨기 향부자 풀에이슬이 맺히네.


※ 여름의 긴긴 해가 어느 날 문득 짧아졌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가 지나고 나면 낮의 길이가 날마다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겠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언제 지나가랴 싶던 여름이지만, 어느 날 자고 일어나보니 어제 같지 않게 동이 늦게 트고 또 새벽 공기가 서늘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미 가을이 온 것이다.

여름이라고 바람이 없을 리는 없지만, 무더위 때문에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던 바람이 기온이 낮아지면서 몸에 와 닿는 느낌이 저절로 들 때가 있다. 가을이 왔다는 자각과 동시에 찾아오는 것이 쓸쓸한 감정이다. 밤이 차츰 길어지고, 바람기가 부쩍 느껴지고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쓸쓸한 느낌이 든다면, 이 모두는 가을이 왔다는 신호인 것이다.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식을 줄 모르던 불볕더위는 슬그머니 물러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 불볕더위는 비록 불청객이었지만 여름 내내 떠날 줄 몰랐던, 시인이 머무는 시골집의 유일한 손님이었다. 그 손님이 작별 인사도 없이 스리슬쩍 떠나고 나자 집안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였을까? 시인은 부쩍 외로움을 느꼈고, 그래서 새벽녘까지 잠 못 들고 있다가, 끝내는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때 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가을의 진객(珍客)인 이슬이 그것이다. 계단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나 있던 향부자(香附子) 풀에 이슬이 맺혀 있었던 것이다. 더위라는 여름 손님이 가고 이슬이라는 가을 손님이 온 것이리라.

입추(立秋)부터가 가을 절기이긴 하지만, 가을 느낌이 나는 것은 대개 처서(處暑)가 지나서부터이다. 매미 소리 대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부쩍 짧아진 밤 시간에 대한 자각, 서늘해진 바람의 감촉, 섬돌 아래 풀 위에 맺힌 이슬, 이러한 것들이 모두 초가을을 구성하는 정취들이다. 여기에 자신도 모르게 찾아드는 쓸쓸함이 더해지면 초가을의 정취는 한껏 물오를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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