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엔
9월엔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5.08.3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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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 <수필가>

이젠 창을 닫아야 한다. 적당히 선선하던 저녁바람에 살그머니 가을빛이 스며들었다. 한낮의 햇살도 푸른 들로 스미는지 부드럽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맹렬하게 들끓던 열기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절기 앞에서 맥을 못 추니 시간의 흐름이 참으로 신비롭다.

어느 산모롱이 노란 마타리꽃 하늘거리고 이파리 뒤 숨어 자라던 결실들이 밖으로 드러나는 시간 9월. 9월이 오면 기차여행을 떠나고 싶다. 올해엔 시간 내 간이역 여행을 하자고 곁에 사는 후배와 약속한 건 나른한 봄날이었는데 서로 바빠 어긋나는 스케줄 때문에 겉말이 되었다. 일이 좀 한가해지나 싶으면 몸이 반란을 일으키고 몸이 좀 가벼워지나 싶으면 없었던 일도 생긴다. 모두 털어내고 9월엔 하루 간이역을 찾아 떠나고 싶다. 다랑이 논마다 벼이삭들 바람에 몸 부비는 소리, 해바라기씨 익어가는 소리도 듣고 길섶이며 밭두렁마다 촘촘히 심어놓은 콩꼬투리 여무는 모습도 보고 싶다. 겅중겅중 칡잎 위를 걸어가는 긴 다리 호랑거미도 만나고 사투리 다정한 구멍가게 아주머니에게 믹스커피 한잔 얻어먹으며 사는 얘기 듣던 따스한 추억도 다시 만들었음 좋겠다. 정겨운 풍경 두어 장 수채화로 남길 수 있음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바람 까슬한 9월엔 편지함도 만원이다. 여기저기서 찾아드는 청첩장, 그리고 모임안내문들. 그 속에 하나쯤 끼어 왔으면 하고 나도 모르게 기대하는 게 있다. 손 편지다. 그나마 군에 간 아들에게서 가끔 날아들던 손 편지가 요즘은 뜸하다. 수업 후 꼬마 친구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색종이에 적어줄 때 그 짧은 글귀 삐뚤빼뚤한 글자에서 나의 어린 날을 보곤 한다. 백열등 아래 밤늦도록 공들여 편지를 쓰던 기억들이 그립다. 애기똥풀 꽃잎을 곱게 말려 편지지마다 예쁘게 붙여 보내던 추억. 9월엔 가까운 이들에게 손 편지를 보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된 잉크를 열어보고 펜촉도 추려 책상 위에 올려놓으니 손이 꼬물꼬물 가렵다. 누군가를 마음에 그리며 정성들여 한 줄 한 줄 사연을 적어나가는 일은 참으로 행복하다.

단풍 들기 전 덕수궁에도 가보고 싶다.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는 시간의 멋을 느끼고 싶다. 10월의 고궁은 너무 뜨겁고 복잡하다. 단풍든 고궁을 즐기려는 인파로 가득해 고요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9월의 조용한 평일 그도 오전이 걷기에 좋다. 혼자 걸으며 생각을 갈무리해 봐야지. 근처 미술관에 들러 전시도 보고 물고기 그림 새겨진 예쁜 등잔이 있으면 하나쯤 사들고 오리라. 온화한 등잔불 아래서 오랜만에 소월을 읽어봐야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여름까지 와버린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지 달력을 한 장 넘겨놓고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가슴이 설렌다. 온난화로 절기의 구분이 희미해진다고 하지만 아직 짧으나마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다.

9월은 내 자리에서 지켜야 할 것들, 사회적 책임감, 해야 할 많은 역할과 쌓인 책들, 그리고 의무감을 내려놓고 하루쯤은 빈 마음으로 걷고 싶은 달이다. 누군가에겐 땀 흘리며 결실을 거두어들여야 하는 시간,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계획이 시작되는 시간, 누군가에겐 아픔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겠지만 가끔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루쯤 살고 싶다. 9월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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