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이 둘이 아님
선과 악이 둘이 아님
  • 박숙희 <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 승인 2015.08.30 18: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박숙희 <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마음의 문을 열고 더 자세히 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를, 가진 것 없이 줄 수 있는 삶으로 반추하려는, 그 마흔 한 번째 이야기는 ‘직지’ 하권 30장 지공 화상 14과 게송(誌公和尙 十四科頌) 중 여섯 번째 공덕을 기리는 善惡不二이다. 전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부산 화엄사 주지 각성 스님의 ‘직지’ 번역 및 강해(1998년)를 참조했음을 밝힌다.

나는 스스로 몸과 마음이 쾌락하여/ 고요해서 선도 없고 악도 없네.

법신은 자재하여 방위가 없나니/ 눈에 부딪치는 것마다 正覺 아닌 것이 없네.

육진(六塵)이 본래 공적하거늘/ 범부들이 허망하게 집착을 낸 것이다.

열반과 생사가 평등하나니/ 사해(四海)에서 누구를 厚(후)하게 薄(박)하게 하랴?

함이 없는 큰 道는 저절로 본연함이니/ 마음을 가지고 긋거나 재지 마라.

보살은 얽매임 없어 방탄하고 영통하여/ 하는 바가 항상 묘각(妙覺)을 함유하고 있거늘/ 聲聞(성문)은 법을 고집해 좌선하는 것이 누에가 실을 토해서 자신을 얽어매는 것 같네.

법성(法性)은 본래 둥글고 밝으니/ 병이 나음에 어찌 藥(약)을 고집 할 것인가?

모든 법이 모두 평등함을 알면/ 고요하고 맑고 비어서 쾌락하리라.

지공화상은 선·악을 다 초월하셨다는 것이겠다. 즉 지공화상 정도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가늠 할 수 없을 만큼 지공화상의 도가 높고 컸다. 라는 것이겠다. 이는 지공화상은 관세음보살의 후신격인 그 도처럼 짐직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겠다.

눈에 부딪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한단다. 우주법계에 법신이 충만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마다 법신 아닌 것이 없다. 라는 것이겠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는 정각(正覺)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말한단다.

중생과 부처가 모두 다 평등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후하게 대하고 중생을 박하게 대할 것이 없다. 라는 것이란다. 하나의 이치가 똑같이 평등한 것이라는 것 아닐는지. 무위의 대도는 본연한 것이고 천진한 것이므로 공연히 분별심의 마음을 가지고 계산하고 긋고 재고 헤아리고 따져 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겠다.

소승 성문들이 틀에 박힌 법을 고집해서 좌선만 하는 것은, 누에가 실을 토해서 스스로를 얽매는 것과 같다. 라는 것이겠다. 누에가 실을 토해서 고치를 만들고 고치 집에 들어가서 그것이 제일 좋은 자기의 보금자리, 안락국으로 여기겠지만 그것 때문에 펄펄 끊는 ‘화탕지옥’에 들어가는 격이란다. 중생들이 업을 지어서 自繩自縛(자승자박)하는 것이 누에가 실을 만들어서 고치 집을 짓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겠다.

이는 차라리 거미가 될지언정 누에가 되지 말아야 된다는 것. 거미는 똥구멍으로 실을 내지만 그 실에 묶이지 않는다. 거미는 그것으로 그물을 쳐서 벌레들을 잡아먹는데, 입에서 실을 내는 누에들은 고치 집을 만들어서 잡아먹힘을 당하는 격 아닌가.

원래 소연이란 편안하고 고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새가 날개를 잘 피고 날아갈 때의 기분을 말한단다. 그때 기분이 얼마나 좋겠는가? 새가 날개를 펴 어떤 구속이나 속박, 걸림 없이 소요자재(逍遙自在)한 것. 이는 지공화상 게송 중‘고요하고 맑고 비어서 쾌락하리라.’처럼 ‘스스로 몸과 마음이 쾌락하여 고요하다.’라는 것은 선과 악이 둘이 아님이라는 것 아닐는지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