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1.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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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같은 사랑
오 미 경 <수필가>

지난 토요일, 중요한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새벽 한 시가 넘었다. 금요일 저녁에도 빠질 수 없는 모임이 있어 참석했다가 자정을 넘겨 돌아온 터라 피로가 겹쳤다. 다음 날이 일요일이라 오전 늦게까지 잠을 자도 되겠구나 싶었는데, 마중 나온 남편 말이 내일 시골에 가야 한단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며칠 전, 어머님은 토요일에 와서 총각김치를 담아가라 하셨다. 그래서 어머님께 토요일엔 서울에 올라가야 하니 일요일에 가겠다고 한 것이었다.

일요일 아침, 눈이 떠지지 않는 것을 겨우 비비고 일어났다. 서두른다고 한 것이 열 시나 되어 시댁에 도착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들에 나가고 계시지 않았다. 그리고 샘가엔 어느새 다 다듬어 소금에 절여놓은 총각무가 큰 통에 한가득 담겨 있었다. 얼마 뒤에 들에서 어머님과 아버님이 함께 들어오셨다. 그런데 한 달 여만에 뵙는 아버님의 모습은 예전과 너무도 달랐다.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병원에 다니시는데 병원에서 맞는 독한 주사 탓에 머리가 많이 빠지신 것이다. 여기저기 맨 살이 훤히 보이는 아버님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기가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한 달 사이에 10년은 늙으신 것 같았다. 고된 농사일을 하시면서도 늘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는 분이신데. 어머님은 들에서 돌아 오시자마자 마늘 찧어놓은 것, 깨끗이 씻어놓은 쪽파, 찹쌀 풀 등을 내어주셨다. 어머님이 내어주시는 것들을 넣고 고춧가루 양념을 개었다. 결혼한 지 벌써 15년이 되었건만 키만 껑충한 며느리는 갓 시집온 새댁처럼 늘 일하는 게 설다. 고무 통에 한 가득 들어 있는 총각무에 개어 놓은 양념을 넣고 버무리는데, 손만 바쁘게 움직일 뿐 양념이 골고루 배어들지 않았다. 보다 못한 어머님이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달려들어 총각무들을 이리저리 뒤척이셨다. 총각무엔 금세 양념이 빨갛게 고루 배어 먹음직스러워보였다. 어머님은 어제 서울에서 늦게 와서 피곤하지 않느냐면서 액젓을 넣지만 않으면 혼자 버무려놓았다 가져가라고 할 텐데, 하셨다. 어머님의 고향은 목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머님은 비릿한 것은 입에 대지도 못하신다. 생선은 물론 김치에 액젓이 조금만 들어가도 못 드신다. 그래서 계원들이나 부녀회장들끼리 바닷가에 놀러가기라도 할라치면 어머님이랑 한 상에 앉는 사람들은 늘 포식을 한다고 했다. 바다에서 나는 것 중 드시는 거라고는 오로지 김과 미역, 그리고 멸치뿐이다. 한 통 가득 먹음직스러운 총각김치를 보면서도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집에서 농사지은 것이라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제각각인 총각무를 다듬는 일이 보통일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머님은 아버님과 함께 전날 하루 종일 다듬으셨다고 했다. 집에서 드실 것은 전날 이미 따로 버무려 놓으셨고, 내가 가서 버무린 것은 세 아들네가 먹을 것이었다. 총각김치를 통에 가득 넣어 차에 싣고 나니 어머님은 무를 친정에 가져다드리라며 한 자루나 주셨다. 뿐만 아니었다. 총각무도 김치 해 드시라며 따로 챙겨 주셨다. 어머님은 예서 저기로 바람같이 다니시며 주섬주섬 먹을 것들을 내어주셨다. 현미 찹쌀이랑 찹쌀, 목포 가서 사 온 것이라며 멸치랑 마른 오징어, 서리를 맞아 그냥 먹어도 달디단 감, 뒤뜰에서 딴 표고버섯, 호박, 감자. 어머님이 주신 것들은 차의 트렁크에 가득 차서 뒷좌석에까지 실어야 했다. 점심을 차려 함께 먹고 설거지를 하자마자 어머님은 애들 기다리니 얼른 가라며 쫓듯이 밀어낸다. 손엔 벌써 빨랫거리를 한 아름 안고 계셨다. 부지런한 어머님은 잠깐이라도 앉아 쉴 줄을 몰랐다. 아버님은 들에 시금치가 잘 자랐으니 좀 가져가라며 칼을 들고 먼저 나가셨다. 아버님이 주시는 시금치를 받아 실은 뒤 인사를 드리고 나서 동네를 빠져나가는데 가슴 한 구석이 왠지 무겁고 아렸다. 열개를 주시고도 한 개를 받으시면 고맙단 인사를 잊지 않으시는 어머님과 아버님. 자식들에게 단 한 번 싫은 소리 않으시는 분들. 늘 해드리는 건 변변치 못하고, 그 넓은 바다와 같은 사랑을 한없이 받기만 한다. 자식은 전생에 빚쟁이란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해가 갈수록 부모님한테 받는 사랑이 무거워진다. 이젠 받기보다 드려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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