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 이은희 <수필가>
  • 승인 2015.08.25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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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희 <수필가>

집 안 구석구석을 훑고 달아난 밤손님이 계시다. 그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적나라하다. 마늘과 양파 껍질이 여기저기 흩어져 너저분하다. 건조대에 널어놓은 빨래 또한 저만큼 날아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빨래가 저 정도로 자리 이동을 할 정도면 그의 위력이 여간 아니다. 

고함 또한 거세었으리라. 그런데 자칭 예민하다고 여긴 나의 꿈결은 어떠한가. 어이없게 꿀잠을 잤으니 그저 상상에 맡긴다.

밤손님의 정체는 바람이다. 그를 관장하는 신은 ‘도둑’으로 몰아 불쾌할 수도 있으리. 

그러나 요즘 내가 느낀 그에 관한 평균 감성지수는 마이너스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듯하나 이면에는 꼭 갈등을 부려놓고 달아난다. 

우리 집만 해도 그렇다. 낮에 나의 살갗을 스친 바람은 자신의 전부를 내줄 듯 부드러웠다. 그러나 밤의 얼굴은 어떠한가. 집안을 난장판 만들어놓고 달아나지 않았던가. 그가 어떤 변명을 해도 바뀌지 않는 진실이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바람은 어떤 위인인가.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잎들이 도리질할 때 산란하는 햇빛으로 신록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게 하는 조력자인가. 아니면 눈속임과 갈등을 조장하는 헤살꾼인가. 나뭇잎은 제 살끼리 부딪쳐 생채기 나거나 철 이른 낙엽 신세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기도 한다. 나무가 바람 탓을 한 적은 없으나 바람이 중간에 끼어들어 나무를 힘들게 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 보면 바람은 조력자이자 헤살꾼이다. 병도 주고 약도 주는 격이다. 

신이 바람을 보내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인간도, 나무도 심심하다 못해 무료했을지도 모른다. 나뭇잎의 흔들림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면 그저 자연의 현상 일부분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 또한 아무런 갈등 없이 밋밋하게 행복한 결말로 끝을 낸다면 무슨 재미가 있으랴. 세상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하는 듯싶다.

보이지 않는 걸 가르쳐준 당사자가 바람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뭇가지를 흔들고, 강물에 물결을 일으키고, 갈대의 머리털을 헝클어뜨린 바람은 내가 평생에 걸쳐 배운 것을 단숨에 깨닫게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는 진리를. 바람이 아니어도 우주 만물은 본능처럼 살아남고자 갈등은 계속되리라는 것을. 세상도 요지경 속 바람 또한 요지경 속이다. 복잡한 세상을 가수 밥 딜런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라고 노래했고, “너의 모든 것은/ 바람이 쥐고 있다”고 이생진 시인은 바람을 겁나게 읊었다. 

우리는 바람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람을 벗어나서 살 수 없단다. 이정하 시인은 오죽하면〈바람 속을 걷는 법〉을 알려주겠는가. “바람이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빗자루로 바닥에 너저분한 껍질과 먼지답쌔기를 쓸어낸다. 마늘과 양파도 바람에 몸을 맡긴 탓일까. 양파를 상자에 넣고자 만지니 겉이 뽀송뽀송하다. 

난 참으로 우둔하다. 그의 잔해를 말끔히 쓸어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람은 이미 양파 속 깊숙이 숨어들어 나를 보란 듯 바라보고 있다. 이제 밤손님은 내 손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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