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나무야 나무야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8.2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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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 이수안 <수필가>

안개 자욱한 하루가 열린다. 한낮에는 햇볕이 강렬할 거라는 조짐이다.

오늘은 많은 양의 포도를 주문한 고객에게 직접 배달하기로 한 날이다. 트럭에 실은 포도를 싱싱한 상태로 안전하게 배달하려면 공기가 서늘할 때 수확해 날이 뜨거워지기 전에 배달을 마치는 게 좋다. 부지런히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고 과수원으로 차를 몬다.

동네는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다. 탈탈거리며 운반기가 들어가는 복숭아밭을 지나자, 길가에 트럭을 세워놓고 복숭아 수확용 상자를 싣던 이웃이 건강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인다.

지난날의 수고를 손에 쥐는 계절, 시세 같은 건 나중 문제고 수확의 기대로 동네는 탄력이 넘친다.

포도 수확 가위를 들고 밭에 든다. 포도를 한 송이 따서 들고 보는데 감회가 새롭다. 생긴 모양은 거봉과 흡사하나 연초록 바탕색에 연홍빛이 감도는 <홍서보>라는 품종이다. 달고 과즙이 풍부하며 특히 향기가 일품이라 마니아층이 두꺼운 편이다.

단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비가 오면 포도 알이 처참할 정도로 갈라져버린다는 것이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사처럼 참으로 쉽지 않은 품종이라 완벽한 한 송이의 포도를 들고 이 아침 감동에 젖을 수밖에 없다.

음성에서 포도농사 지은 지 9년, 수확 철만 되면 희한하게도 비가 많이 오고는 했다.

장마 때는 말만 무성하고 가물다가 정작 포도 철이 되자 쉬지도 않고 주구장창 내린 해도 몇 번 있었다.

그런 해는 이 품종이 일제히 갈라져 나무에 달린 채 발효되어 포도원 입구부터 포도주 익는 냄새가 진동하고는 했다. 그렇게도 곱던 포도가 수확도 못 하고 풍화되어 갈 때면 ‘이놈의 애물단지를 다 없애버려야지’ 하면서도 차마 그러지 못했다. 하여 한 해 한 해 버티다 지금까지 왔는데 올해는 수확이 끝나면 정말 포도나무를 잘라야 한다. 우선순위에서 밀려 집을 못 짓고 읍내에서 살았는데 내년에는 이 자리에 집을 지을 계획이기 때문이다.

수확 철마다 그렇게도 속 썩이던 품종의 포도 <홍서보>, 올해 이렇게 오롯이 잘 익은 것은 순전히 날씨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 믿는 것은 짐작하는 바가 있어서다.

나는 두 딸과 사위와 집 지을 자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왔다. 집에서도 했지만 포도밭에서도 했다. 본채는 여기, 주차장은 여기, 정원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등등.

전에 나는 어떤 책을 통해 나무가 주인의 속마음까지도 읽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나무 앞에서 틈만 나면 집 지을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했으니 나무도 자신의 운명을 눈치를 챈 게다.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나무가 마지막 열매를 가장 좋은 포도로 만들기 위해 모든 힘과 의지를 동원한 것이 아닐까. 마치 지는 해가 가장 아름다운 노을빛을 남기고 서산 너머로 잠기는 것처럼.

수확 철에 비만 오면 갈라지고 터져 상처투성이가 되는 품종 <홍서보>. 주인이 걸어온 삶을 너무도 닮아 더 애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나온 길이 험할수록 잘 완주했을 때 더 아름답지 않겠는가. 무던히도 애태우게 하던 포도지만 나는 지금의 이 아름다운 모습만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나무야. “톡 톡” 가위질 당할 때의 통증보다 더한 아픔으로 한 송이 한 송이 떠나보내는 너의 마음을 나는 안단다.

나도 너를 그리 아픈 마음으로 보낼 것이기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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