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 대한 효(孝)보다 더 중요한 것은(2)
부모에 대한 효(孝)보다 더 중요한 것은(2)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8.2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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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마침내 왜적은 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고 성의 뒷산으로 올라가 아래로 압박해서 내려오니 순식간에 쫓긴 백성들이 모두 성안으로 밀려들어 움직일 수조차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에 송상현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급히 조복(朝服-관원이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예복)을 가져와 갑옷 위에 입고, 남문 위에 올라가 호상(胡牀)에 기대어 손을 모으고 단정히 앉았다고 한다. 그 모습이 마치 우뚝한 산악(山岳)과도 같았다고 한다.

얼마 뒤 적이 들이닥쳤는데 그중에 다이라노 시게마스(平調益)란 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통신사 다이라노 시게노부(平調信)를 따라 왕래할 때 송상현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송상현이 자못 우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시게마스는 이를 감사히 여기고 공에게 보답하고자 하였다. 이에 성 옆의 공지를 가리키며 눈짓으로 피하라고 하였으나 송상현은 응답하지 않았다. 시게마스는 송상현이 깨닫지 못한 줄 알고 또다시 손으로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부사 송상현은 개의치 않고 이미 호상에서 내려와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이어 아버지에게 보낼 글을 적었다.

‘외로운 성에 달무리 지고, 여러 진들은 단잠에 빠져 있네. 군신의 의가 중하니 부모의 은혜는 오히려 가볍다 (孤城月暈 列鎭高枕 軍臣義重 父子恩輕)’ 하고 드디어 호상에 앉아 해를 당하였다고 한다. 해석을 해보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해도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큰 불효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忠)을 위해 효(孝)를 가볍다 한 것은 부모에 대한 효의 정신도 중요하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의 정신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충을 기반으로 한 송공의 죽음은 불효가 아니라 참된 효라는 사실까지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충렬공 송상현의 의로운 죽음은 진정한 의미의 충이자 효이다. 이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정신과 기운이 평소와 같이 흐트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후 적장 다이라노 요시토시(平義智)와 겐소(玄蘇)등이 이르러 칭찬하며 탄복하고는 공을 살해한 적을 끌어다가 죽여서 두루 알렸다고 한다.

당시 송상현에게는 부인 말고도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한금섬은 함흥기생이었는데 기생신분으로 사는 것이 기구하여 12살 되던 해에 강물에 빠져 머리만 둥둥 떠 있는 것을 송상현이 구해주어 그때부터 따르게 된 경우였다.

그래서 부산 동래로 남편이 떠날 때 기미상궁의 역할인 음식을 만들어 보필하라고 딸려 보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적에게 욕설하고는 몸을 더럽히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또 한 여인은 이양녀인데 스승의 딸로 스승이 돌아가시자 고아가 되었기에 수양딸로 거두어 침방상궁의 역할을 하도록 딸려 보냈다고 한다.

송공을 따라서 동래로 왔다가 적이 곧 접근할 것이라고 하여 고이 내보내 서울로 돌아가던 중 길을 떠난 지 하루 만에 부산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애통해하며 말하기를 “나는 차라리 지아비 곁에서 죽겠다”하고 동래로 돌아갔다.

그때 사로잡혀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청을 들라고 했지만 거절하니 의롭게 생각하여 놓아주고 마침내 절개를 보전하고 귀국하였다.

이 씨는 사로잡힐 때 송공의 비단 갓끈을 차고 갔는데 항상 몸에 지녀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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