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적암
묘적암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15.08.2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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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용례 <수필가>

법당 문고리에 밀짚모자가 걸려 있다. 스님은 출타 중이시다. 마루에는 나처럼 중늙은이같이 덜 익은 호박 몇 덩어리와 비들비들 말라가는 버섯 몇 개가 신문지위에서 초가을 햇볕을 받고 있다. 나는 부처님께 삼배 올리고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편안하고 좋다.

묘적암은 송림 사이로 시오리는 걸어야 부처님을 알현할 수 있다. 귀한 것은 쉽게 손에 넣을 수 없고 기암절벽은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돌계단을 밟고 올라야 비로소 일주문에 들어설 수 있다. 반가의 기와집 같은 묘적암,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천장 낮은 법당엔 관세음보살님과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나옹화상의 영정이 정성스럽게 모셔져 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종이 장판과 온돌방이 주는 포근함이 법당이라기보다는 고향집에 온 것처럼 따스하다. 

기다리는 이도 없는데 오늘이 세 번째 걸음이다. 초파일 전날 길을 잘못 들어 들르게 되었다. 길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대승사 가는 길을 물으니 거기보다는 묘적암이 기도의 효험이 있다며 같이 가잔다. 기도 하러 가는 길도 아니고 할머니 혼자 걸어가시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모셔다 드렸다. 그런데 또 때가 되었으니 공양하고 가라는 말에 주저앉았다. 

묘적암은 문경의 사불산 대승사의 말사 암자로 고려 말에 나옹선사가 출가하여 수행한 사찰로 유서 깊은 암자다. 그리고 성철, 서암 스님처럼 덕이 높은 고승들의 수행처로도 유명하다. 1500년의 긴 역사에도 과하게 포장한 곳이 없다.

암자에서 보이는 앞산의 풍경이 싱그럽다. 뜰 위에 놓인 댓돌, 회색빛 고목이 과묵하다. 마당엔 나옹선사와 해인사의 전설을 담은 돌이 앉아있다. ‘하루는 나옹이 상추를 씻고 있는데 가야산 해인사에 불이 난 것을 알고 상추 씻은 물을 해인사 쪽을 향해 뿌려 불을 껐단다. 늦게 온 나옹을 스님이 나무라자 나옹은 물그릇을 부딪쳐 물을 바닥에 쏟아버렸다. 그러자 그 물방울이 마당의 작은 바위에 부딪히더니 그 자리에 한자로 마음 심(心)자를 새겼다’는. 내 마음이 탁해서일까 마음 심(心)자를 보려고 애를 써도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왜 기다리는 이도 없는 이 묘적암을 찾아오는 것일까? 나옹선사, 성철스님같이 큰 어르신들이 머물면서 다스렸을 정신세계를 넘보는 것도 아니다. 일주문에 새겨진 ‘불이문’, 요사채에 걸려 있던 편액에 ‘일묵어뢰’라는 글귀가 나를 사로잡는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침묵은 곧 우레와 같다는 말. 고즈넉함을 즐기다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나는 불자도 아니고 불경도 모른다. 그러나 큰소리치는 사람보다는 침묵하는 사람이 더 무섭고 어렵다. 묘적암 마루처럼 편안함을 주는 곳이 곧 극락이다. 나는 잠시 극락에 머무른 듯했다. 돌아서면 또 깨질지라도 잠시 묘적암에 머무는 동안 사람에 대한 미움이나 욕심을 버린 겸손한 마음이었다. 사람살이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나름의 크기로 살아가는 것이다. 묘적암은 고승들의 큰 발자취처럼 엄숙하다. 체구는 작지만 진중하다.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 가고 있다. 나는 구도자의 길처럼 숙연한 숲길로 천천히 내려왔다. 출타 중인 스님은 오셨나 자꾸만 뒤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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