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를 논하다-마디를 자르는 대나무
사군자를 논하다-마디를 자르는 대나무
  • 윤승범 <시인>
  • 승인 2015.08.18 1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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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윤승범 <시인>

사군자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대나무입니다.

옛 어른들은 말과 행실이 같기를 바랐겠지만 결코 말과 행실이 같은 경우는 쉽지 않았습니다.

속이 비어있는 대나무를 통해 물욕(物慾)이 없는 무욕(無慾)의 삶을 추앙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가진 자들의 행태를 보면 결코 삶과 뜻이 같지 않음을 느낍니다.

일개 서민의 삶이야 가지고 싶어도 가질 것이 없고 비우고 싶어도 비울 것이 없으니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텨나갈 뿐입니다. 오늘 놀면 내일을 걱정해야 하고 내일까지 놀면 한 달이 버겁습니다.

그러기에 비우고 채운다는 생각마저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천부의 삶이어서 무욕(無慾)이라는 대나무의 번듯한 삶은 멀기만 합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의 곳간은 항상 가득 차 있지만 남 보기에 비어있는 듯해야 질타도 면하고 청렴도 뽐낼 수 있기에 매양 대나무처럼 무욕의 마음으로 비웠느니 어쨌느니 하지만 허위에 가득한 그들의 행태가 가소롭기만 합니다.

이렇게 사군자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조차 어쩌면 위정자들의 장자연(莊子然)한 허위의식을 따라하는 것 같아 괜히 시작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가진 자들이 논하는 대나무의 무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대나무 마디마디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대나무는 그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한 뼘 정도의 마디로 나누어져 자랍니다. 아랫마디와 윗마디는 서로 나뉘어져 있고 어느 한 마디가 잘려도 다른 마디는 저 스스로의 역할을 합니다.

과거와의 단절과 이음의 상징입니다. 우리네 삶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살다보면 허물도 생기고 과(過)도 적지 않습니다. 새롭게 살아보려 하나 누추한 과거가 우리네 발목을 잡습니다.

전과(前過)의 기록이 쉽게 새로운 삶의 자세를 허락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 때 마디 하나를 잘라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자세. 그것이 의미를 대나무 마디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나간 과거가 현재의 나를 규정짓고 현재의 나가 미래의 나를 만들어낸다는 영속성. 때로는 그것을 단호하게 끊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과거가 현재의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 과거의 틀이 현재의 틀을 가두고 있을 때 우리는 때로 제자리에 멈출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도마뱀이 제 꼬리를 툭 잘라내고 온몸으로 치열하게 살 듯 우리네 삶도 때론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 살을 자르고 아프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견뎌내고 단호하게 새롭게 시작하려는 마음, 그 한 마디 마디 분절(分節)의 인내를 통해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모습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잘 드는 칼로 대나무 윗둥을 잘라내고 잘라내서 날마다 환골탈퇴 하는 그런 삶의 자세를 대나무 마디에서 구하고자 합니다.

자르고 잘라도 또 잘라내야 하는 세월의 더께는 어찌해야 할지,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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