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무슨 꿈을 꾸시는가
그대, 무슨 꿈을 꾸시는가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5.08.17 1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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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영숙 <시인>

바람이 일으킨 모래사막처럼 파도가 밀려왔다 나간 자리에 보자기처럼 모래 주름이 펼쳐진다.

흰 도화지를 대한 것처럼 무언가 적고 싶은 마음에 쪼그리고 앉았다. 때마침 가리비 껍데기 하나가 파도에 밀려 발밑에 서성인다.

건져 올려서 깨끗하게 정리된 모래위에 대었다. 그리곤 커다란 하트 안에 또박또박 내 이름자를 써넣었다. 예전엔 서슴없이 남편과 아들딸의 이름을 쓰고 하트를 그렸다. 이제는 그 자리에 망설임 없이 내 이름을 써넣는 일, 어쩌면 그 일이 진정으로 가족을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

화살처럼 쏟아지는 태양 아래 젊은 열기를 발산하는 청춘들의 함성이 뭉게구름을 흩뜨리는 오후, 여름 한낮의 대천 바다는 꿈꾸는 사람들로 푸른 정글이다. 옆자리의 어린 여아는 모종삽을 이용해 서너 개의 모래성을 쌓아 놓고 야무지게 다지는 중이다. 밀물 때라 그런지 제법 쌓은 모래성이 견고하다. 이따금 비키니 수영복 차림으로 모래사장을 오가는 아가씨들의 모습도 풋풋하게 들어온다. 이두와 삼두박근 몸매를 과시하는 보디빌더들을 바라보며 해변을 걷다 보니 제법 긴 시간이 흘렀는지 해가 물속으로 가오리연처럼 늘어진다.

해변 윗자락에 위치한 나무그늘 아래 돗자리엔 간간이 고단한 숨소리를 뱉어가며 단잠 중인 어른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중력의 영에 이끌려 낙타처럼 살아온 삶이 구름처럼 솟아오른다.

조각 손처럼 매끄럽던 남편의 손등에도 어느새 세월이 앉았다 간 흔적이 역력하다. 가족을 위해 낙타처럼 살아온 고단한 삶이 다큐처럼 펼쳐진다. 한때는 우리에게도 모래성을 쌓으며 미래를 꿈꾸던 시절, 친구들과 어깨동무하며 파도를 타던 젊음이 있었다. 그리고 모래 위에 나란히 하트를 그려 넣고 전파보다 강렬한 눈빛을 주고받던 주홍빛 연애 시절이 있었다.

국어교사가 꿈인 나는 초등학교에서 논술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보디빌더가 꿈인 남편은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오면서 어느새 정년을 가깝게 둔 나이가 되었다. 호기를 부리고 나가 짚트랙을 타고 돌아온 남편은 고됐는지 파도 소리를 타고 두시간째 단잠 중이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니 아마도 꿈을 꾸는 모양이다.

‘그대, 무슨 꿈을 꾸시는가? 타자로 사느라고 잊었던 사자 꿈이라도 꾸시는가? 산티아고 노인이 멕시코 만에서 잡은 6m 되는 청새치라도 낚았는가?’

머지않아 남편의 ‘바다’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아니라 해변을 뛰어노는 자유로운 사자의 정글이 될 것이다. 가족 때문에 낙타가 되어야 했던 비굴함을 벗어버리고 사자처럼 포효할 줄 아는 기백과 전사처럼 사느라고 잊었던 어린이의 순수함을 지닌 본래의 자아로 돌아갈 것이다.

정년퇴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일의 노예로 산 까닭에 놀이할 줄을 모른다. 일이 없으면 불안하다는 말은 자유를 누릴 줄 모른다는 말과 상통한다. 정사각형 틀처럼 긴밀하게 짜인 삶 속에서 수십 년간 기계적인 로봇으로 살아왔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낙타처럼 자동화된 노예와 삶의 짐꾼으로 살아온 이들에게 정년은 그야말로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보는 오롯한 자신만의 본 장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거리인 부부, 오늘 새삼 그가 고맙다. 낙타→사자→어린이의 노선으로 돌아가는 길, 잃어버린 야성과 어린이성을 회복하여 자유를 찾아가는 그 여정에 흔들리지 않는 나침반이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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