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낮잠
여름 낮잠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8.17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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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삼복 동안이면 무더위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기승을 부린다. 그래서 밤에도 기온이 낮아지지 않아 잠을 설치기가 쉽다. 이럴 때 긴요한 것이 바로 낮잠이다. 여름철 무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주는 것으로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제아무리 유명한 여름 보양식일지라도 여름 낮잠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려(高麗)의 시인 이규보(李奎報)는 어느 여름날 오후 늘어지게 낮잠에 빠진 어느 팔자 좋은 사람을 보는 행운을 누렸다.

◈ 여름 어느 날(夏日卽事)

簾幕深深樹影迴(렴막심심수영회) : 발 쳐진 깊숙한 곳 나무 그림자 어른거리고
幽人睡熟鼾成雷(유인수숙한성뢰) : 은자는 깊은 잠에 빠져 우레 같은 코 고는 소리 들리네
日斜庭院無人到(일사정원무인도) : 해 저무는 뜰에 사람은 오지 않고
唯有風扉自闔開(유유풍비자합개) : 불어오는 바람에 문짝만 닫혔다 열렸다 하네

※ 시인은 무더운 여름 어느 날 깊은 산 속에서 은거하는 벗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시인은 여름 낮에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을 구경하게 되었다. 인적이 드문 산속인지라 집에 대문이 있을 필요가 없다. 있어도 아마 열린 채로 방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집으로 들어서니 곧장 방문 앞이다. 방문은 활짝 열려 있고, 대신 갈대로 엮은 발과 헝겊 휘장이 드리워져 있다. 아직 시인이 만나러 온 벗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방 안은 어찌나 깊숙하게 보이던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는 없고 다만 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그 방에 찾는 벗이 있음을 안 것은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귀를 통해서였다.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 소리는 그 집주인이 낮잠을 자면서 낸 코 고는 소리였다. 대낮임에도 사람이고 짐승이고 어느 것도 찾아오는 일이 없어서 고요하기 그지없는 곳이었기에, 그리고 세상 걱정과는 담을 쌓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르러 태평한 삶을 살다 보니 코 고는 소리가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코 고는 소리를 천둥소리라고 함으로써 고요함과 태평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 시인의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예고 없는 시인의 인기척에도 시인의 벗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평하게 코를 골며 낮잠을 즐길 뿐이다.

시인은 벗의 낮잠을 그대로 둔 채 가만히 집 안을 관조하고 있을 뿐인데 해가 기울도록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사람은 고사하고 짐승도 새도 오지 않는다. 벗의 코 고는 소리를 빼고는 적막만이 흐르는 이 집에 가끔 들리는 소리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바람에 닫혔다 열렸다 하는 사립문소리였다.

사립문소리는 사람이 찾아와 문을 열면서 내게 되어 있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바람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리라.

무더위에 지쳤을 때, 그리고 세파에 찌들어 지쳤을 때 모든 것을 잊고 깊은 산 속 고요한 곳을 찾아가 낮잠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호사(豪奢)는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없으며 사회적 지위나 명예로 얻을 수도 없다.

한여름 산속 깊은 곳에서 즐기는 낮잠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전 아닌 특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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