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발 부추기는 은폐 관행.
재발 부추기는 은폐 관행.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5.08.16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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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보은·옥천·영동>

OECD 국가들에 대한 각종 사회환경 지수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대체로 고전을 면치못한다.

자살률, 행복지수, 정부신뢰도, 교통사고 등을 조사해 매긴 순위에서 우리는 꼴찌 아니면 바닥권이다.

OECD 간판을 내리고 ‘중진국’으로 돌아가서 심기일전하자는 자조적 푸념이 터진다. 이런 마당에서 기특한 수치가 하나 눈에 띈다. 

산재사고 부상재해율이다.

이 지수는 늘 OECD 국가 중 상위 3위안에 든다. 산재사고로 발생하는 부상자 비율이 미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 선진국보다 훨씬 적다. 이 조사대로라면 우리나라는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안전을 철저하게 보장받는 나라이다. 

사실이 그럴까. 의구심이 무럭무럭 커 갈 즈음 또 하나의 수치가 이 조사결과를 뒤집어 버린다. 산재사고 사망률이다. OECD 국가에 대한 이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부동의 1등이다. 2012년 자료를 보면 현장 근로자 10만명당 산재사고 사망률이 7.3이다. OECD 29개국 평균인 2.6의 3배에 육박한다.

도대체 이 수치수러운 수치가 어떻게 선진국들을 압도하는 산재사고 부상재해율과 병립할 수가 있을까. 사망사고는 부지기수로 터지지만 부상사고는 별로 없다는 희한한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우리 사회의 그늘진 생리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사람이라면 이 모순된 결과들이 나온 배경을 어렵잖게 파악할 것이다. 많은 산재사고들이 은폐되기 때문이다. 사망자가 발생한 사고는 사법기관의 조사가 불가피해 숨기기 어렵다.

그러나 근로자가 부상에 그친 사고는 얼마든지 당사자와의 합의를 통해 은밀하게 해결할 수 있다. 사고가 나면 기록이 남는 119에 신고하는 대신 병원 구급차를 부르는 것이 관행이다. 이런 이유로 산재사고 80% 가까이가 노출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사고 자체가 없었던 것이 되니 사망을 제외한 재해율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사고를 은폐하면 가중 처벌하는 처방이 절실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감독관청으로서도 업체가 현장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관행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사고들이 꼼꼼히 체크돼 재해율이 올라가면 질책은 물론이요 원인을 보고하라, 대책을 세우라, 현장 감독을 강화하라는 등 귀찮은 지시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된 수치에서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리 없고 산재사고가 줄어들 리도 없다.

학교나 병영에서 사건·사고가 줄지않는 이유로도 상습·고질화된 은폐 관행이 꼽힌다. 사고가 터지면 피해자를 제외한 조직 전반이 은폐 모드로 들어간다. 들통이 나더라도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니 이런 공작이 근절될리 없다.

지난해 윤 일병이 내무반에서 갈비뼈가 14개나 부러지고 온 몸이 피멍 투성이의 주검으로 발견됐을 때 군이 처음 발표한 사인은 ‘음식을 먹다 발생한 질식사’였다. 사인을 조작한 의혹이 숱한 정황들과 함께 제기됐다. 그러나 군 검찰은 폭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해 윤 일병을 죽음으로 내몬 가해 병사들에게는 실인죄를 적용하면서 은폐 조작 혐의로 기소된 헌병대장과 수사관, 군의관 등은 모두 불기소 결정했다.

여학생과 여교사들이 남자 교사들에게 장기간 성추행과 희롱을 당해온 서울 한 공립고의 기가 막힌 사건도 가해자와 방관자들의 공모와 은폐가 주범이었다.

첫 사건에서 교육청 보고와 조사, 징계의 상식적 절차가 진행됐다면 재발을 막았을 것이다.

조직적이고 관행적인 은폐 행위가 재범을 부추기고 피해자를 늘렸다. 사건의 은폐와 축소, 조작은 직접적 가해행위 못지않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교내 폭력과 성범죄 발생 시 교장의 신고를 의무화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우리의 고질적 문제들을 개선하려면 은폐를 고무·선양하면서 ‘근절’을 부르짖는 기만적 행태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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