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 대한 효(孝)보다 더 중요한 것은(1)
부모에 대한 효(孝)보다 더 중요한 것은(1)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8.16 1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얼마 전 끝난 ‘징비록’이란 드라마는 파란만장했던 임진왜란과 조선시대 선조 임금 대의 수치스런 역사 상황을 그대로 묘사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극이었다. 드라마에서 나왔듯이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정치 현장에서 난을 겪은 서해 류성룡이 적어 내려간 그 어떤 사료보다도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게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는 명분으로 일어난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그러면 바닷길도 있는데 일본은 왜 꼭 우리나라를 통해서 가야만 했을까?

당시 일본은 국내 전쟁만 했기 때문에 수군이 약했다. 그래서 뱃길을 통해 바로 명나라를 침략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정세에 일대 변혁을 초래한 중대한 사건이다.

임진왜란 전 우리나라의 정세는 200여 년 이상 전쟁이 없어 외부 침략에 대한 경계가 허술했다. 그리고 오랜기간 평화가 지속되다 보니 군사적인 힘이 약화되어 있었고 많은 왜구가 침범하긴 했지만 왜구를 잘 막아냈다. 

그 당시 이율곡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10만명의 군사를 기를 것을 주장했으나 지배 계급들은 세력 확장을 위해 당파싸움을 일삼고 있었다. 이때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했는데 서인인 황윤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며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서로 상반된 의견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무런 대비도 없이 7년간의 전쟁에 시달려야 했던 조선은 엄청난 소용돌이를 체험해야만 했다.

조선이 성리학의 절정을 달리던 16세기 당시 일본은 각 지역의 영주들이 서로 실권을 갖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힘이 센 자가 모든 것을 손에 넣는 약육강식의 시대인 전국시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왔을 때 조선이 자신의 정복 계획을 받아들이고 일본 영주처럼 자기 휘하로 들어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조정은 동인과 서인의 분열로 일본의 침략에 아무런 대비조차 없었다. 

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관군은 제대로 방어조차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신식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의 침략에 결국 조선은 임금이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는 치욕을 당하고 만다. 왜적이 서울로 오기까지 유일한 저항이 동래성 전투였다. 당시 동래부사였던 송상현의 저항과 순절은 각지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송상현은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았다. 그때 경상도 좌병사 이각은 너무나 많은 적의 숫자에 놀라서 도망을 쳤다. 그러나 동래부사인 송상현은 병사들을 단속하며 싸울 태세를 갖춘다.

왜적은 이미 군대를 호에 주둔시키고 “싸울 수 있다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주어라(戰則戰矣 不戰則 假我道)”라고 목패를 가지고 남문 밖에 서 있도록 하였다. 이때 송상현은 “싸우다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내어 주는 것은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목패에 글을 써서 적에게 던짐으로써 싸울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에 부녀자들까지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던지며 저항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