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직·생활용품·건설 이어 IBT 이끌다
방직·생활용품·건설 이어 IBT 이끌다
  • 안태희 기자
  • 승인 2015.08.1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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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인의 광복 70년 - 재계

충북의 기업인들은 광복이후 물류·방직에서 생활용품, 금융, 건설에 이어 IBT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면서 지역경제를 선도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충북이 ‘멜팅 폿(melting pot)’이 되면서 향토기업인과 외지출신 기업인들이 ‘선의의 경쟁’을 통해 지역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광복이후 70년간 충북의 경제와 함께한 기업인들을 역대 청주상공회의소 회장들의 임기와 비교해 살펴봤다.

# 향토 기업인들의 태동(광복~1953)

상공회의소 임의단체 시기

‘교육구국’을 앞세우며 청주대를 설립한 형제중 한명인 김원근(1886~1965)은 8세에 집을 떠나 청주로 올라와 상인이 됐으며, 1899년부터 조치원에서 해산물 도매상과 무역상을 경영, 성공한 뒤 미곡과 광업으로 거부가 됐다. 1946년 충북신보사와 충북산업주식회사의 사장이 됐다. 일제강점기 지방부호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내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김종호(1936~1989)는 1943년 청주에서 ‘충북제도사’란 작은 도자기 회사를 차렸다. 72년 전통의 무차입, 무감원 기업인 ‘한국도자기’의 대역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세계 톱5의 회사로 성장한 한국도자기의 역사는 김 회장의 창업과 도전으로 시작됐다.

▲ 1950년대 충주비료공장

# 자수성가형 기업인들의 도전(1954~1964)

청주상의 회장 제1대 김유복(1954~1957·중선화물자동차 사장). 제2,3대 이도영(1957~1961·남한제사 사장). 제4대 권태성(1961~1964·태성상회 대표)

1950년대 들어서는 맨손으로 큰 기업을 일구는 ‘자수성가형’ 기업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민철기(1908~1991)는 1958년 신흥제분을 창립하면서 한때 전국에서 종합소득 2위에 오르는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속리산관광주식회사, 청원제사, 중도석유등도 차렸다. 청주신흥고등학교가 남았다.

이도영(1913~1973) 일신그룹 회장은 경제계와 언론계에서 두루 족적을 남겼다. 1949년 남한제사주식회사를 설립한뒤 남일건설, 남한제지, 청주문화방송 등을 설립했다. 2세 경영체제의 실패로 80년대 들어 잊혀져갔다.

전응규는 청주방직을 세웠다. 그는 70년대 중반까지 동방섬유, 충북은행 설립참여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 매진했다. 이 회사는 현재 심텍홀딩스로 변신해 꾸준한 기업활동을 펴고 있다.

박용학(1915~2014)은 1955년 대한농산_을 창립했다. 이 회사는 80년대 초중반까지 8000명에 이르는 근로자가 다니는 충북최대의 기업이었다. 1997년 회사정리절차가 개시된 이후 신영에 흡수됐다.

▲ 1960년 청주상의 회의모습

# 거침없는 고속성장(1964~1982)

청주상의 회장 제5, 6대 김종호(1964~1970·한국도자기 사장).제7,8,9대 김우현(1970~1979·국제산업공사대표) 제 10대 장인환(1979~1982·삼화물산대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충북의 기업인들이 거침없이 질주하던 시기다.

민한기는 1966년 3월 23일 충북교통(忠北交通)을 설립해 충북지역 여객운수업을 중흥시켰으며, 이 회사는 지난 2004년 충북리무진으로 사명을 고쳤다.

오주열(1920~2009) 대신정기화물 창업주는 1966년 8월 차량 3대로 대신정기화물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으며 이 회사는 현재도 국내택배업계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기적을 주세요’라는 광고카피로 유명한 국보제약(현 국보싸이언스)의 안민동대표(70)는 지난 1968년 청주로 이전한 이후 위생 해충방제 약품제조에 전념하고 있다.

1972년 부산에서 대원모방을 창립한 전영우(85) _대원 회장은 철저한 내실경영으로 올해도 건설업 시공능력 충북 1위를 기록한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1984년 본점을 청주로 옮겼다.

또 오동선(98) 삼화콘덴서그룹 명예회장이 삼화전기(1973)를, 김호수(1930~2015)는 곡물 건조기 제조업체 신흥기업사(1974)를 청주산업단지에서 창업했다. 그는 창업후 20년만인 1994년에 남강장학재단을 설립, 지금까지 장학사업을 펼치는 등 향토기업인의 모범이 됐으나 지난 6월 86세로 타계했다.

표재범(80) 삼화토건 대표는 1975년부터 1982년까지 9·10·11대 건설협회 충북도회장을 지낼 정도로 지역사회의 대표적인 건설인이었다. 오선교(65) _선엔지니어링 회장이 1975년 선건축설계사무소를 창업해 굴지의 회사로 성장시켰다.

▲ 1970년 대농

# 지역자립의 꿈 영글다(1982~1994)

청주상의 회장 제11, 12대 박재철(1982~1988·서울상호신용금고 대표), 제13, 14대 민권식(1988~1994·대성연탄 대표)

1980년대는 지역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한 청주상공회의소가 박재철 회장을 중심으로 상공회의소 회관 건축을 위해 2425평을 매입하는 등 지역자립의 꿈을 키웠다. 1980년대 말부터는 중부고속도로의 개통, 청주산업단지 제4단지 준공등으로 급성장했다. 청주산업단지에 지금의 LG그룹 계열사들의 입주가 이어졌으며, 지역경제의 근간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김상면(69) 자화전자 회장은 1981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에 회사를 설립했다. 이 기업은 연간 매출액 1조원의 회사로 급성장했다.

▲ 1979년 한국도자기

# 환난과 암울의 시기(1994~1999)

청주상의 회장 제15, 16대 한현구(1994~1997·한림식품 대표),제16대 오운균(1997~1999·세원건설 회장)

1990년대 중반 이후 IMF로 기업인들에게 최대의 시련이 닥쳐왔다. 민권식(79) 전 청주상공회의소 회장이 불법대출 혐의로 구속되는가 하면 한현구(76), 오운균(65) 회장이 각각 1997년과 1999년에 부도를 맞으면서 지역경제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1996년 IMF사태 발생후 3년간 충북도내에서 부도를 맞은 지역의 대표적인 건설사 대표들만 14명에 이르렀다.

# 새인물의 등장(1999~현재)

청주상의 회장 제16대, 17, 18, 19, 20대 이태호(1999~2012·청주양조), 제21대 오흥배(2012~2013·대신정기화물 회장), 제21, 22대 노영수(2013~현재·동화대표)

이 시기는 IT와 BT등 첨단기술로 무장한 신흥기업인들이 조용히 충북경제의 중심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무한경쟁 시대에 새로운 인물들이 지역경제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안태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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