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지사들 소신행정·희생정신으로 역사 한 페이지 채웠다
도지사들 소신행정·희생정신으로 역사 한 페이지 채웠다
  • 엄경철 기자
  • 승인 2015.08.1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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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인의 광복 70년 <정관계-2>

광복 이후 역사의 격랑속에서 많은 충북 출신 행정관료들이 각 분야에서 활동했다. 해방과 전쟁, 정부수립, 5.16이후 군사정권, 산업화라는 역사의 현장에 지역출신들이 있었다. 

충북 출신들은 국가 위기와 난국에 기용되곤 했다.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지역 성향의 지역이미지가 근현대사에 그대로 반영됐다. 지방정부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장을 열어갔다. 지방행정을 이끌었던 행정관료들 중엔 지방과 중앙정부를 넘나든 인물이 많았다. 때로는 소신행정, 역사의 희생양으로 충북 출신 행정관료들은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 나갔다.

 

1960년 초대 민선도지사 조대연 44% 당선

17대 오용운 행정에 경영마인드 도입 혁신

정종택 5부 장관·3선 의원 … 입지전적 인물

김종호 6선 의원·국회부의장 지낸 정치거물

# 지방행정 수장 … 충북도지사들

1948년 윤하영 지사가 첫 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시종 현 지사가 34대로 활동하고 있으니 70년 동안 33번이나 지사가 바뀐 것이다.

초대 지사였던 윤 지사는 독직(瀆職)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자리에서 내려왔다. 당시 업무횡령과 공무서위조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2대인 이 광 지사 재임시절에 6.25가 터졌다. 6.25가 발발하자 이 전 지사는 그해 7월 옥천으로  피난처를 삼았다. 전세가 악화되자 이 지사 일행은 10일 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남하했다. 당시 부산시청 앞 부민관에 임시사무소를 마련했다.

5대 정낙훈 지사(1953년 12월 10일~1955년 8월 29일)는 이승만 정부에서 농립부장관에 기용되기도 했다.

청주 출신의 6대 김학응 지사는 1공화국에서 충북지사와 충남지사를 지냈다. 충남지사로 있을 때 4·19혁명이 일어나 3·15부정선거 충남지역 책임자로 기소됐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됐다.

7대 정인택 지사(1958년 7월 29일~1960년 4월 30일)도 3·15 부정선거에 휘말렸다. 4·19혁명이후 충북지역 책임자로 기소됐다. 5·16이후 열린 혁명재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부문에 들어 있다.

1960년 12월 29일 실시된 충북도지사선거에는 조대연, 감경, 민종식, 이규석, 김관록 등 5명이 출마해 조대연 후보가 득표율 43.9%로 당선됐다. 초대 민선도지사이자 제9대 지사였던 조대연 지사는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사임했다. 

5·16이후 충북도정은 군출신이 장악했다. 5·16직후 향토사단인 37사단장에 고광도 준장이 임명됐고, 고 준장은 5월 24일 충북도지사로 부임했다.

12대도 군 출신인 최세인 소장이 임명됐다. 1962년 3월 14일 취임한 최 소장의 당시 나이는 35세로 최연소 도백으로 기록됐다. 최 지사는 1947년 3개월 코스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6·25전쟁에서 전공을 세워 33세에 별을 달았다.

도정이 다시 민정으로 이양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취임 하루 전인 12월 16일이다.

1973년 9월 26일 17대 지사로 취임한 오용운 지사도 군 출신이다. 진천이 고향인 오 지사는 육사 1기로 1966년 육순 소장으로 예편하고 철도청장으로 부임, 군인에서 행정관료로 변신했다. 영동역 화재사건으로 인한 문책인사로 물러났지만 박 대통령이 재신임해 충북지사로 발탁됐다.

오 지사는 지방행정에 경영마인드를 도입한 CEO형이었다. 관료사회에서 쉽지 않은 구조조정을 단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 지사는 부임 3년째인 1976년 괴산 저수지 공사와 관련해 건설업체의 투서로 옷을 벗었다. 당시 예비역 장성모임인 ‘성우회’관련 건설업체에 공사를 맡긴 것이 특혜시비를 야기시켰다. 이후 오 지사는 마사회장 등으로 중용되면서 박 대통령의 변함없는 신뢰를 엿볼 수 있었다.

오 지사가 물러나고 정종택 지사가 충북지사를 이어받았다. 1976년 취임한 정 지사는 3선 국회의원과 5개부처  장관을 지냈다.

정 지사는 1980년 충북지사에서 노동청장으로 기용된 이후 제33·34대 농수산부장관, 정무1장관, 두 차례의 환경부장관을 역임했다. 내무부 토목국 임시 촉탁직에서 출발, 5부 장관과 3선 국회의원까지 지낸 지역에서 드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정 지사는 장관과 국회의원 시절 청주국제공항, 한국교원대, 공군사관학교 이전에 큰 역할을 했다. 환경부장관 시절 전국적인 자전거타기 붐을 조성하기도 했다.

김종호 지사는 1980년 1월 17일부터 9개월 동안 충북지사를 지냈다. 6선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지역의 정치거물이었다. 내무부에서 공직을 시작한 김 지사는 내무부장관, 정부제1장관 등을 역임했다.

김 지사 재임기간인 1980년 7월 보은에서 대규모 수해가 발생했다. 보은 수해지역 응급복구 현장에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눈에 들어 정 지사가 내무부차관에 있을 당시 민정당 창당멤버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김 지사는 ‘국민을 하늘과 같이 두려워하면서 일해야 한다’는 위민행정(爲民行政)을 설파했다.

24대 주병덕 지사 재임시절 1990년 9월 단양군 매포지역 수해가 발생했다. 매포지역 주민들이 피해보상과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국도를 점거하는 농성을 벌였고, 현장을 방문했던 주 지사가 주민들에 붙잡혔다. 주병덕 지사가 국도를 점거한 수재민들에게 붙들려 ‘수자원공사의 실책을 규명하고 피해를 전액 보상해 수해지역주민들을 집단이주시켜 줄 것을 약속한다’는 각서를 써주고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물러난 주 지사는 1995년 지방자치단체선거를 통해 민선지사로 복귀했다.

경찰 출신의 주 지사는 그해 자민련 돌풍에 힘입어 당선, 24대에 이어 29대 지사를 지냈다. 주 지사는 신한국당으로 당적을 옮겨 재선을 노렸으나 자민련 후보로 출마한 이원종 지사에게 졌다. 30대 지사에 당선된 이 지사는 1992년 26대 지사를 지냈다. 이 지사는 충북지사 부임 1년 만에 서울시장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1994년 성수대교 붕괴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 1965년 5월 8일에 제13대 신명순 도지사가 청원군에서 물못자리 가식법을 강의하고 있다

 

▲ 1960년 11월 2일에 제9대 조대연 도지사 단양 초도 순시

/엄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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