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야서 걸출한 인물·작품 배출 … 문화 갈증 풀어주다
다양한 분야서 걸출한 인물·작품 배출 … 문화 갈증 풀어주다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5.08.12 17: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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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문단 선두 주자 정지용 김복진 근대조각 큰획

1945년 광복 이후 충북의 문화예술계 70년은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일제 억압에 억눌려 있던 예술활동은 해방 후 향토예술문화를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1946년 창간된 국민일보(옛 충청일보 전신)에 문화부서가 생겼고, 청주사범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의 예능과 교사들을 중심으로 예술활동이 전개됐다. 6·25 전쟁으로 예술활동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휴전 후 예능 교사들에 의해 명맥이 이어졌다. 

1957년 1월 충북에서 처음으로 예술인들이 결합한 충북문화인협회가 결성되었고, 1959년 제1회 충북예술제가 청주공업고등학교 교정에서 첫선을 보였다. 

1962년에는 문인, 음악, 미술, 서예, 연극, 무용, 연예 및 변론 등 9개 문화단체가 통합해 충북문화인협회를 예총(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으로 개편했다. 이로써 지역문화예술계는 왕성한 창작활동과 발표의 장을 구축했으며, 시민들에게 문화예술의 갈증을 풀어주는 창구구실을 했다. 

광복 이후 지역문화예술계는 다양한 분야에서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다. 충북인의 광복 70년을 돌아보며 문화예술계를 빛낸 인물 중 작고 예술인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국악계 거인 청주출신 박팔괘

청주출신 추신 극단 조직

# 문학계
조선 선비들의 남다른 글 사랑은 수많은 개인 문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유교를 바탕으로 철학적 사유를 곧추세워온 전통은 다른 분야보다 활발했다. 일제 강점을 전후해 광복 문단의 선두 주자는 단연 정지용이다. 옥천 출신의 정지용은 한국 현대시의 거장으로 청록파 시인을 탄생시키며 한국 현대문학을 빛나게 했다.

시인 박두진은 “지용은 작은 체구로 얼굴에 예지의 기상이 번득였으며, 비범한 눈빛이 영롱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그의 천재적인 기질은 오만에 가까운 당돌성과 패기를 느끼게도 하나 그러한 엄숙한 풍모 속에는 소탈함과 자상함을 숨기고 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감자꽃’ 시인 권태응은 충주 출신으로 토속적 정서를 무기로 항일의 기치를 높였고, 흙의 작가 이무영과 염재만 소설가는 음성 출신으로 농민과 농촌생활을 그려내 문풍을 새롭게 했다. ‘백조’ 동인으로 활동한 김팔봉(기진)은 한국문예비평의 기초를 닦아 주목을 받았으며, 보은 출신 오장환은 봉건 체제를 부정하며 현실적 시쓰기로 참여작가로의 면모를 보여줬다. 지역문단에 씨앗을 심은 청주 출신 신동문과 민병산은 청소년들과 향토문인들의 도서 출간에 자극제가 되었다.

# 미술계
해방 후 미술계는 침체와 혼란을 거듭했다. 해방 전 조각가 김복진이 근대조각의 획을 그었지만, 전반적으로 미술 활동과 미술인의 수는 없다 할 정도였다. 1956년 이후 미술교사를 중심으로 협회 결성이 이루어졌으며, 1960년 충북예술제가 열리면서 미술분야의 활동이 본격화됐다.

충북의 미술계에서 거목을 꼽으라면 단색화의 거장 윤형근과 정창섭이다. 청주 출신 윤형근은 한국 환원주의 미술운동의 거장으로 1950년대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한 첫번째 한국작가다. 정창섭은 닥을 소재로 풍부한 물성을 표현해 단색화가로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한국만의 독특한 화풍인 단색화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 출신이지만 말년에 청주에 뿌리내린 김기창도 빼놓을 수 없다. 장애를 딛고 한국화단의 정상에 오른 김기창은 운보의 집을 통해 지역화단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해체적 선 작업으로 화단을 앞서갔던 이완호, 지역 풍경을 화폭에 담은 증평 출신 왕철수 등이 있다.

# 국·음악계
전통 음악이 강세였던 우리나라 음악은 해방 후 진취적이고 한민족의 얼과 애수에 찬 곡들이 사랑을 받았다.

충북 음악계는 학교 음악을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했는데 합창, 독창, 피아노, 기악 등의 연주가 열렸다. 1954년 이후 크고 작은 음악회가 많았으며, 1960년 음악협회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국악계의 거인으로 해방 전후로 첫 손으로 꼽히는 인물은 청주출신 박팔괘다. 조선말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이면서 가야금 병창 창시자로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별세했다. 유명한 일화로 고종황제의 어전 연주 때 네 개의 줄이 끊어졌으나 여덟 줄만으로 연주를 훌륭히 마쳐 임금이 감탄하여 팔괘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음악계에서 정순철은 옥천 출신으로 한국동요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증평 출신 성악가 김일회는 이태리 유학파로 서원대에서 후진양성과 교육을 통한 예술활동을 전개했다.

# 연극과 사진, 무용계
1900년대 충북 연극계는 김복진, 김기진, 이무영 등이 활동하였으나 연극협회가 조직된 것은 1957년이다. 그리고 1960년대는 연극협회 발족과 아동극, 고교 대학 내 연극동아리들이 태동한다. 이후 1970~80년대는 극단 창단이 활발해지면서 충북연극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청주 출신 김근수와 김성렬은 연출가로 활동했다. 이들은 1957년 연극분과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지역연극계를 이끌었다.

청주 출신 추신은 1944년 극단을 조직하고 희곡을 썼다. 전후 상처받은 인간들을 해학적인 문장으로 그리되 치밀하게 구성하는 사실주의 기법을 사용했다. 김동리는 그의 작품을 추천했는데 “그 작품에 내포된 작자의 극한 의식이 독자에게 깊은 충격을 주고 문단의 호평을 사게 된 근본”이라고 칭찬했다.

사진계는 해방 후 직업사진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삼호사진관으로 한국인 첫 사진관을 개업한 김동근, 일본 오리엔탈사진전문학교에서 유학한 연미사진관 이종석, 반도사진관의 권윤상이 경영과 사진 지도를 했다. 예술사진의 태동은 1953년 사진가연합회 충북지부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된다.

무용계 역시 학교교사들에 의해 맥이 이어졌다. 청주 출신 송선호는 충북예술제를 계기로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용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무용발전에 기여했다.

/연지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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