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죄와 벌
  • 최 준 <시인>
  • 승인 2015.08.0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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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 최 준 <시인>

포청천이라는 판관이 있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았고 법대로 법을 집행했다. 죄 지은 자가 있으면 그가 어떤 위치에 있건 단호하게 단죄했다. 왕족도 고위관리도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판관으로서의 책무를 소신껏 실천한 공평무사(公平無私)의 상징이었다.

법 없는 나라는 지상에 없다. 그러니 법은 한 나라를 이루는 근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소위 잘 되는 나라는 예외 없이 법의 정의가 제대로 서 있고 실천되는 나라다. 사회적인 약자라고 해서 법적인 불이익을 받지 않고 강자라고 해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일면 당연한 듯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 당연해야 할 법의 적용이 현실에서 정작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는 그다지 많지 않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에서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의도적이었든 단순한 실수였든 양심이 아니라 실정법에 위배되는 행위를 했다면 그는 법에 의한 단죄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는 국가의 어떤 구성원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다지 신뢰하거나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장 부러운 건 그 나라는 법에 있어서만은 정의에 보다 가깝다는 것이다. 잘못이 있으면 현직 대통령도 법정에 세우는 나라, 대통령을 기소한 검사가 어떠한 불이익도 당하지 않는 게 당연한 나라. 인종전시장인 미국이 성조기 아래서 하나가 되어 세계적 강자가 된 이면에는 정의를 앞서 실천한 법제가 있었다. 미국에는 최소한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없다. 

대통령의 사면에 대해 말들이 많다. 여당과 야당의 입장 차이가 큰데 그 논란의 중심에 소위 경제인들이 있다. 실형을 언도 받아 수감 중이거나 집행유예 기간 중인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창업하고 일생을 통해 회사를 일군 기업이 아닌 물려받은 회사의 주인들이다. 말이 좋아 기업인이지 따지고 보면 좌판 크게 벌여놓은 대물림 장사꾼들에 다름 아니다. 이들을 사면 대상에 포함시키느냐 아니냐를 놓고 갑론을박이다. 사면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쪽은 그들이 나라의 경제에 끼친 공헌을 감안해서 한 번 더 사회를 위해 일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고 사면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사면의 특혜를 그들에게만 주는 것은 법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아무려나, 그들은 이미 법의 심판을 받았고 법정이 언도한 대로 형을 살고 있다. 형기가 길든 짧든 다른 범법자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돈 많은 그들은 경제인으로서 지켜야 할 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단죄를 받은 것이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고 모종의 혜택이 있을 수 없다. 상(賞)과 벌(罰)은 공평과 공정을 기반으로 한다. 상으로 벌을 상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도 안 된다. 비유가 적절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의적 홍길동도 국가적인 입장에서 보면 분명 범법자였다. 홍길동의 생존 배경이었던 사회와 법제가 근본적으로 불공정한 신분시대였더라고 해도 말이다.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만약 포청천에게 경제범죄자들에 대한 사면의 판단을 맡긴다면 그는 어떤 결정을 할까. 그는 절대로 사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수많은 범법자들도 사면을 해야 하니까. 그래야 공정하고 공평하니까. 그들은 많은 것을 가진 만큼 가진 그것을 옳게 사용하고 사회를 위해 일할 기회도 더 많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자신을 위해서 위법을 저지르고 편법으로 사회와 나라에 해악을 끼쳤다. 공헌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오히려 죄를 범했다. 죽지 않으려고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는 빠삐용들은 동정이라도 받지만 그들은 동정의 여지마저도 없다. 사회의 암세포들이다. 국민 정서는 생각지도 않고 이들의 사면에 찬성한다니,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동료의식인가 아니면 값싼 동정심인가. 돈과 권력에 눈먼 이 시대에 포청천은 진정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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