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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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5.08.0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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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흔들리는 버스 안, 재잘거리는 승객들의 속삭임도 흔들흔들 춤을 춘다. 창밖엔 건물들과 나무들이 휙휙 지나가며 나를 엿보고 나도 창밖의 세상에 설핏설핏 시선을 던진다. 청주를 출발할 때부터 잔뜩 골이 난 회색 하늘은 청주를 벗어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 아직도 회색으로 칙칙하게 진을 치고 있다. 울퉁불퉁한 노면을 만났는지 잘 가던 차체가 쿨렁거린다. 김밥 한 줄과 귤 두 개 그리고 생수 한 병으로 쿨렁이는 차 안에서 아침을 쿨렁쿨렁 넘긴다.

두 시간을 달려 서울에 발을 디딘다. 버스를 내리며 발끝을 쳐다본다. 조심스럽게 낯선 땅에 발 도장을 찍는다. 찌푸렸던 하늘이 추적추적 빗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비 내리는 낯선 도시에서 맞는 생경한 바람이 좋다. 미술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밀가귀전이다. 고려 인종 때 중국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이 ‘나전(자개를 붙여서 장식하는 공예)’을 보고 세밀가귀라고 했단다. ‘세밀가귀’란 ‘솜씨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라는 뜻이란다.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마주한 지난 세월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국의 미는 여백의 미라고만 여겼던 난 우리 미술품의 세밀함과 정교함뿐 아니라 그 화려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조상의 도예작품과 나전칠기작품 그리고 초상화를 보며 무늬의 섬세함과 모양의 정교함 그리고 묘사의 세밀함에 한번 놀라고 인간의 능력에 다시 한 번 놀란다. 그 오랜 시간 전 사람들이 어쩜 저렇게 말도 안 되게 화려하고 세밀하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들의 혼이 녹아내린 작품들을 보며 오래된 것들의 무게, 사람의 손으로 이룩한 것들에 대한 경외감, 그리고 지난 시간의 소중함을 조곤조곤 곱씹어 본다. 미술관을 배경으로 지난 세월과 마주한 나를 한 컷을 찍어 넣는다.

점심 후 동대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다는 것은, 보며 느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넘나드는 것이리라. 12세기 찬란했던 장인들의 숨결을 만났으니 이제 21세기 사람들이 가장 치열하게 살고 있는 시장을 보고 싶었다. 메르스의 여파인지 손님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상인들은 장사가 너무 안 된다며 싸게 갖고 가라고 성화다. 청주에서는 보지 못했던 갖가지 옷들이 눈에 들어온다. 옷장에 있는 옷들을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 옷들과 함께 입어서 어울릴 법한 옷들을 들었다 놨다 한다. 칩거형인 나로서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이라는 조급함이 작동을 한다. 옷들의 화려한 유혹에 넘어가고 싶어진다. 상가를 모두 훑고 옆 상가까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돌아다닌다. 이런저런 옷들을 걸쳐보며 일상을 잊어 본다. 이제 비워야 할 나이인데 자꾸 취하려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청주로 내려오는 차 안, 한껏 부푼 쇼핑 가방을 좌석 밑에 내려놓는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커튼을 연다. 하늘이 말갛게 웃고 있다. 비로 씻긴 나무들이 흔들리며 스친다. 산은 어느새 여름 속에서 부풀어 눈앞에 가까이 와 있다. 진한 초록으로 속부터 꽉꽉 차서 푸르게 푸르게 계절 속에 빛나고 있다. 나도 저렇게 속부터 꽉 채워져서 알차게 부풀어야 할 텐데, 여전히 보여지는 부분에만 신경을 쓰는 것 같은 나를 되돌아본다. ‘옥처럼 고귀해 지려 말고 돌처럼 소박하라. 빛나되 눈부시지 마라’ 는 노자의 말이 차창 너머 산속에 알알이 박혀서 나를 쳐다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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