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스리기
마음 다스리기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5.08.0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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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

장마 끝 땡볕의 위력이 대단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른다. 그렇다고 혼자 있으면서 에어컨을 켜기도 민망하다.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알량하게 남아있는 양심을 긁어대기 때문이다. 선풍기 바람도 싫어하다보니 결국 어린 날처럼 찬물에 발을 담그고 페이지 잘 넘어가는 소설을 읽으며 자투리시간을 즐기는 게 유일한 피서다.

소설 속 여주인공 링고는 어느날 갑자기 연인이 돈과 살림을 모두 갖고 사라진데다 그 충격으로 목소리까지 잃어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녀는 ‘달팽이 식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작은 식당을 내는데 정해진 메뉴가 없다. 손님의 취향과 인품을 알아낸 뒤 그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에 맞는 요리를 내놓는다. 다양한 사연을 안고 찾아온 손님들은 행복한 마음으로 식당을 나서고 그녀 역시 마음의 치유를 얻는다.

문득 달팽이 식당이 따로 있나? 더위에 지친 한 사람을 위해 오늘 저녁 특별한 요리사가 되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밥의 기본은 밥맛이지. 씽크대 한쪽 구석 스테인리스 밥솥이 눈에 들어온다. 고무 압력패킹이 늘어난 데다 부품이 고장 나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는 중이었다. 요즘 몸이 부실하다는 핑계에 무덥다는 핑계까지 얹어 전기압력밥솥을 사용했는데 밥맛이 살짝 누룽지가 생기는 스테인리스 압력 밥솥만은 못했다. 마침 오후 H백화점 근처에 갈 일이 생겨 미루던 밥솥 뚜껑을 들고 길을 나섰다.

사실 나는 백화점을 좋아하지 않는다. 두어 번 갔다가 교통체증에 질려 만정이 떨어졌다. 그런데 하필 밥솥 서비스받을 매장이 백화점 안에 있단다. 매장엔 손님 서넛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직원에게 서비스를 받으러 왔다고 했더니 대꾸도 없다. 매출을 올리는 일이 더 급하지 싶어 기다렸지만 그녀는 나를 잊은 듯 했다. 엉거주춤 계산대 옆에 서 있으려니 이쪽으로 따라오라 해놓고 또 다른 손님을 맞느라 분주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약이 오르는 중인데 옆 매장 직원이 다가와 도와주겠다며 접수를 받아주었다. 그 직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나오는데 담당 매장 직원과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요리 생각은 어디로 날아가고 마음에는 화가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말을 기대했나보다.

30분쯤 뒤 문자가 왔다. 매장에 있는 부품으로 해결되었으니 찾아가란다. 아까 확인만 해주었어도 이 찜통더위 속에 두 번 걸음 안 해도 될 일이었다.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어떤 표정으로 마주봐야 하나 곤혹스러워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데 매장을 찾아가니 이전과는 딴판이다.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상냥하다. 적응이 안 돼 어지러웠다. 아까는 손님이 많아서 챙기지 못했다고 미안하단다. 그 말에 한마디도 덧붙이지 못하고 물건을 찾아 나오는데 한줄기 소나기가 지나갔다. 그런다고 섭섭함이 바로 가라앉겠는가. 공연히 화려한 언변에 홀려 물 건너온 밥솥을 산 내가 잘못이지 후회마저 되었다.

소나기 지난 덕에 저녁 바람은 견딜만 했다. 오랜만에 쌀을 씻어 압력밥솥에 앉힌뒤 가스불에 올려놓으니 왠지 흐뭇했다. 치륵 치륵 밥솥 추 돌아가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린다. 구수한 밥 내음에 언제 마음이 상했냐는 듯 며칠 기다리지 않고 밥솥을 수선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하루 달팽이 식당 주인이 되어 가지도 썰고 파프리카도 썬다. 빛깔 곱고 탱탱한 가지도 한여름 땡볕의 힘이려니. 무더위 탓인지 사소한 일에 날이 서는 마음을 감사함으로 다스리며 견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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