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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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5.07.2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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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미국에서 활동한 한국태생의 철학자이야기다.

서양철학의 그 분야로는 한 업적을 내셔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분이다. 그 당시의 유행처럼 실존철학을 공부했지만 그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공로가 크다.

미국에서 유명해진 한국태생의 철학자들이 몇몇이 있다. 그런데 그 분들의 문제는 맥락상 그쪽의 것이라서 이쪽의 것과 반드시 통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 분들의 입장에서는 ‘철학적 문제가 한국이고, 미국이라서 다르냐?’고 물으면서 ‘철학은 보편적인 것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끝에 가서 문제가 하나로 통일될지 몰라도 문제풀이 과정은 분명히 다르다.

단적으로 말해, 언어가 다르면 세계도 달라진다. 다른 언어로 같은 철학을 한다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흔히 한국어로도 독일철학이나 영미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체로 ‘번역된 한국어’로 ‘독일과 영미’의 철학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을 기준으로 본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말)철학이 아니라 번역(어)철학인 셈이다.

나는 그분의 강의를 25년 전에 가까이서 들은 적이 있다. 뭐가 뭔지는 몰랐어도 유명한 철학자들 뵙고 싶은 마음이 넘실대던 것은 기억난다. 한국 생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철학자는 지금 말하는 C 교수님, 미국철학회장도 하신 K 교수님, 정치철학자이신 J 교수님 등이 계시지만, 그 가운데에서는 우리말을 가장 잘 하시는 것 같다. 

우연하게도 오랜 벗이 그분 댁에 며칠 머물면서 원하는 책을 얻을 기회가 생겼다면서 나에게도 기회를 엿보게 해준다고 급하게 연락이 왔다. 원하는 책이야 많지만 내가 바라는 책은 ‘살 수 있는 책’이 아니라 ‘그분이 서명했거나 아니면 그분에게 유명한 철학자가 서명해서 준 책’이라는 답장을 보냈다. 

내 말은 ‘그분이 쓰신 책에 서명이라도 있으면 더도 없는 영광’이라는 것이고, ‘아니면 그분이 받으신 다른 철학자(하이데거 등)의 서명이 있는 책’이라도 좋다는 것이었다.

과연 책에 서명하는 것이 옳은가? 책에 서명을 하지 않는다는 분이 있었다. 그분은 자기가 서명한 책이, 그것도 받는 사람 이름까지 함께, 헌 책방을 떠도는 것을 보는 일은 불쾌하다면서, 서명을 하지 않았다. 나도 서명을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까닭에서가 아니라, ‘내가 뭐라고?’라는 면구(面灸)한 느낌에서 안 하는 편이다. 얼굴이 화끈거린다고나 할까. 상대방이 굳이 원하면 한두 번 거절을 하다가 하기도 한다. 받는 사람도 서명을 바라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서 그렇다.

그분은 책을 한국으로 기증하고 싶어 하신단다. 대학도서관이 그 대상이 될 것 같고 ○○ 컬렉션처럼 ○○○ 문고로 남지 않을까 싶다. 나의 책도 내 지도교수가 천 년 전부터 모은 고서적 컬렉션 가운데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언젠가 나도 갚아야 빚이 있다.

듣자하니 생긴 지 얼마 되지 않는 대학에서는 책이 없어 퇴임교수의 책을 받으려고 애쓴다니, 내 문고도 언젠가는 좋던 싫던 생길 수 있겠다. 평생 보던 책을 기증하려했던 어떤 교수는 책이 정본이 아니라고 도서관이 거절해 낭패를 보기도 했다. 저작권개념이 없던 당시에는 다들 복사해서 보지 않았던가.

내가 바란 철학자 하이데거의 서명이 들어간 책은 과연 누구한테 돌아갈까? 그의 조교이자 애인이었지만, 나중에는 큰 업적을 낸 한나에게 서명해준 책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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