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룬 밤에
잠 못 이룬 밤에
  • 이은희 <수필가>
  • 승인 2015.07.2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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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희 <수필가>

노을빛 손톱이 탄생하였다.

손톱에 봉숭아 꽃물들임은 그리움의 산물이다. 저문 해가 산허리로 넘어갈 즈음 서편 하늘을 주홍빛으로 곱게 물들인다. 산 그림자 누운 강물도 물들이고 강물을 바라보는 내 얼굴도 점점 붉어진다. 두 눈에 노을이 넓게 퍼지면,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눈앞에 지나간 추억이 어룽거리고 세상을 등진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라서다. 특히 울 밑에 핀 봉숭아 꽃잎을 조심스레 따던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손톱 위에 가만가만히 꽃물을 들이던 친정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몹시 그리운 날이다.

꽃물들이기는 정성의 산물이다. 봉숭아꽃은 요즘 마당이나 화분에 일부러 심지 않으면 보기 어려운 꽃이다. 활짝 핀 붉은 꽃과 짙푸른 잎을 따 그늘에 약간 말린다. 숨죽은 것들을 절구에 자잘하게 찧어 냉동실에 얼린다. 나는 번거로운 과정을 뛰어넘고 얄밉게 얼린 놈을 거저 공수하여 품에 안은 것이다. 얼마 전 꽃물을 곱게 들인 여동생의 그림 같은 손톱이 부러워 부탁하였다.

늦은 시간 곱게 빻은 봉숭아꽃을 탁자에 놓고 앉아 심호흡을 정갈히 한다. 손이 필요한 집안일을 모두 마친 후에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꽃물을 들이는 작업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한 손가락에 꽃물을 올리는데, 손톱 주변에 꽃물을 흘리고 묻히며 서툴다. 할 수 없이 서울로 떠나는 딸을 붙들어 앉혀 열 손가락을 내민다. 역시 꽃물은 섬세한 손길을 원한다. 숨을 죽이고 젓가락으로 손톱 위에 꽃잎이 넘치지 않도록 자분자분 얹는다. 꽃물이 피부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 지워지지 않는 꽃물을 감당해야 하니까.

결국, 꽃물 든 고운 손톱은 잠을 못 이룬 대가이다. 두 손을 밤새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하고, 두 손을 잠자는 아기처럼 배꼽 위에 얌전히 올리고 잠을 청해야 한다.

모든 걸 포기하고 잠을 깊이 잔다면, 다음날 이불 홑청과 잠옷에 얼룩덜룩한 꽃물을 발견하고 말리라. 심하면 손톱 위에 올린 봉숭아 꽃물이 여기저기 피부에 흘러 핏빛 손가락을 보리라. 그러니 인내의 산물이다.

동생의 빛깔 고운 손톱도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잠 못 이룬 밤을 지내고야 얻어진 것이다. 꽃물들인 손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빛깔이 엷어진다.

해와 달과 별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고 자란 봉숭아꽃.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톱을 곱디곱게 물들였던 봉숭아꽃물. 시간을 초월하여 21세기를 사는 도시 여인이 자연의 기운과 옛 여인의 숨결을 이어 재현한 것이다. 하나하나의 과정과 정성은 어느 때보다 마음이 실린다. 그러니 고운 빛깔의 자연 색을 인공의 미가 어찌 따를 수 있으랴.

어떤 것도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나 보다. 손톱 위에 꽃물들이기는 예스러운 멋을(그리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대상을 다루는 손길에 정성이 깃들어야 하며, 꽃물이 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고운 빛깔의 꽃물을 들이고 싶은 욕망에 따른 고통은 내가 자초한 일. 하룻밤 잠 못 이룬 결과이니 큰 성과가 아닌가. 손톱 끝에 꽃물 든 반달로 떠오르면 더욱 아름답단다. 시간이 흐르면 달도 기우는 법, 눈썹달을 기다리며 노을빛 손톱을 원 없이 감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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