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정밭에서의 협상
묵정밭에서의 협상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7.26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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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수안 <수필가>

날씨가 더워지면서부터 음식물 쓰레기 처리가 부쩍 신경 쓰였다. 집안에 배는 냄새 때문이다.

하여 그날그날 포도밭으로 들고 가 땅을 파고 묻었다. 유기물이 들어가니 땅도 부드러워져 일거양득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문제가 생겼다.

쓰레기를 묻기 위해 땅을 파려고 보면 전날 묻은 쓰레기가 파헤쳐져 있는 것이다. 보나 마나 그 녀석의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동통하게 살찐 누르스름한 고양이 한 마리가 포도밭 주위를 맴도는 것을 보아온 터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던 것이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음식물 쓰레기와 흙이 마구 섞여서 다시 묻어도 퀴퀴한 냄새가 그 주위에 진동했다. 그도 모자라 파리까지 생겨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포도원 작업장에는 간이 부엌이 있는데, 밤새 고양이는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위에까지 발자국을 남겼다.

가끔은 냄비를 엎어놓기도 했다. 출근하자마자 그 치다꺼리에 시간을 뺏길 때면 나는 씩씩대며 중얼거리고는 했다.

“고얀 녀석, 걸리기만 해 봐라. 혼쭐을 내줄 테다.”

그러나 녀석은 잘도 피해 다녀서 나는 보이지 않는 녀석과 신경전을 벌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 열흘쯤 전의 일이다. 밭에서 포도 순을 따던 작은 아이가 내 옆구리를 찌르더니 포도밭 위 손바닥만 한 묵정밭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노르스름한 털의 귀여운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끼의 시선을 따라가던 내 입에서 아! 하고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거기에는 내가 그토록 벼르던 그 고양이가 제 새끼만 한 쥐 한 마리를 입에 물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새끼를 낳고 키우느라 오동통하던 살이 빠져 다소 마른 모습이다. 그렇게도 흙을 파고 냄비를 엎은 것은 다 새끼 때문이었나 보다. 큼지막한 먹이를 새끼에게 편히 먹일 수 있도록 우리는 가만가만 그 자리를 떴다.

다음 날 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식물성과 동물성 두 가지로 분류했다. 식물성은 전처럼 땅에 묻고, 동물성은 새끼고양이가 나왔던 묵정밭 입구에 부어놓으며 협상을 제안했다.

‘앞으로는 흙이 안 묻은 먹이를 새끼에게 먹이렴. 대신 땅은 그만 파는 거다.’

고양이는 내 마음을 읽은 듯 그 이후로는 땅을 파지 않았다. 대신 저들 보금자리 입구에 쏟아 준 먹이는 깨끗하게 먹어 파리도 덜 생기게 되었다.

어제는 과수원 아래쪽에서 올라오는데 작업장 주위에 고양이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들을 이끌고 영역을 확인시키는 중인 듯싶었다. 한 마리인 줄 알았더니 새끼가 네 마리나 되었다. 아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 새끼들을 다 키우느라 동분서주한 어미의 눈물겨운 모성이 짠해 코끝이 맵싸해졌다.

어제 저녁에는 치킨을 먹었더니 뼈다귀가 제법 나왔다. 그래도 고양이네 대가족이 먹기에는 부족한 양이다.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좀처럼 줄지 않는 멸치볶음이 눈에 들어온다. 뼈다귀 봉지에 쏟고 찬밥도 추가해 여민 봉지를 들고 포도밭으로 향한다.

‘이정도면 한번은 배불리 먹이겠지.’

날씨는 며칠째 심하게 후덥지근한데 기분만은 상쾌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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