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길로 갈까요(2)
어떤 길로 갈까요(2)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7.26 18: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일곱 분의 미륵부처님이 무지개를 타고 내당을 향해 오셨다. 엄비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합장을 하였는데 그 미륵불께서 말씀하시길 우리는 충청도 청주 고을에 있는 석불인데 몸이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으니 우리를 구하여 절을 세워 안치해주길 간곡히 당부한다는 말씀을 마치고 안갯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잠에서 깬 엄비는 꿈이 너무도 생생하여 꿈 이야기를 왕에게 고하였다. 그리하여 청주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기를 청했다.

한편 엄비의 꿈 이야기와 함께 상세히 조사하여 고하라는 어명을 받은 청주 군수 이희복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엄비와 똑같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장삼이 온통 흙탕물에 젖고 이마에선 피가 흐르고 목에는 이끼가 낀 부처님이 청주 군수 이희복의 꿈에도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서쪽 깊은 늪에 빠져 헤어날 길이 없어 도움을 청하러 왔으니 꼭 좀 도와달라며 홀연히 서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어명을 받은 청주 군수는 그날로 사방에 사람을 풀어 늪을 조사하도록 했다. 나졸들이 무심천 서쪽에 머리 부분만 밖으로 나와 있는 돌부처 한 분이 흙과 잡초에 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고 황급히 군수에게 고했다. 가보니 낚시꾼들이 석불을 의자 삼아 걸터앉아 낚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석불을 파보았더니 석불은 이마 부분이 손상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동원하여 7일동안 물을 퍼냈더니 모두 7분의 미륵부처님이 나타나셨다고 한다. 이희복 군수는 왕실에 상소문을 올리고 왕실에서는 엄비의 불심을 높이 칭송하는 한편 절을 세우고 칠불을 모시도록 했다고 한다. 이희복은 새로 절을 짓고 칠존 미륵 석불을 봉안하고 용화사라고 했다고 한다. 천 년을 훌쩍 지나 엄비의 불심에 의해 용화사를 복원한 후 청주지역에 자주 났던 홍수 피해가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6·25전쟁 때 법당이 완전 소실되는 바람에 칠존석불도 노천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1972년 비구니 오동 스님과 신도들이 콘크리트 법당인 미륵보전을 새로 지어 안치한 것이다.

용화사의 전각과 탑을 보면 용화보전은 여러 부처(7존 석불)가 함께 있는 부처의 세계를 일컫는 이름이다.

용화보전의 팔작지붕 합각에는 절 만(卍)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신 석불은 중앙에 석조미륵불, 부처님을 중심으로 왼편에 석조석가모니불 오른편에 석조약사불 세 분을 모셨다 하여 삼불전이라고도 한다. 또 석가모니불의 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고 석조약사불의 협시로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심으로 7불의 이상 세계를 구성하였다. 석가모니불 후면의 나한상(유등보살)은 특이한 불상으로 우리나라 미술사 불교 사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08년에는 극락전이 신축되면서 석조유마거사 좌상과 석조여래좌상(미륵보살) 그리고 석조여래 입상(석가모니불 추정)을 옮겨 모셨다. 이 밖에도 관음전과 삼성각이 있으며 오대산 월정사의 8각 9층 탑과 같은 고려 전기에 유행했던 송나라 탑 형식의 8각 5층 석탑이 있다. 용화사의 정문인 용화지문위에는 범종과 법고, 목어와 운판 등 4물을 갖추고 있다.

도심 한가운데서 듣는 은은한 범종 소리는 마음에 낀 때를 씻어주고 욕심을 버리고 선하게 살라는 부처님 말씀인 듯 경건해진다. 사는 게 힘들고 답답할 때 향 내음 맡으며 조용히 앉아 범종 소리를 들으면 어느새 고요해진 나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