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황혼
아름다운 황혼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5.07.2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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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학습발표회 날이다. 럭셔리한 턱시도에 흰 장갑까지 한껏 멋을 낸 동아리 팀 사이로 그분을 본 순간 희망 그리고 화려한 은빛이란 말만 떠올랐다. 몇 해 전만 해도 애잔한 마음이 일렁이며 먹먹한 가슴에 모랫바람이 불었다. 나이란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돌이켜보니 기쁨보다는 슬픔이 차곡차곡 쌓인 일이 많았던 세월.

현직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삶은 팔자이고 운명이라고 했었다. 평생 일로부터 도망칠 수도 놓을 수도 없었던 젊은 시절,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할 운명이었다. 당시 막내 동생은 3살, 농업을 생업으로 살던 시대, 어머닌 3살 동생을 들쳐 업고 농사일을 했다. 그런 환경에서 어렵사리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 고등교육을 마치고 버스비도 아까워 걸어서 회사생활을 했다. 퇴근 후, 닥치는 대로 늦은 밤까지 일해야만 겨우 동생들 학비와 생활을 연명했다.

고된 일을 마치고 동료는 회포를 풀려 주점으로 우르르 뭉쳐 나가면 이런저런 핑계로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피하여 또 다른 일터로 달려가기 일쑤였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어느 악조건이라도 달려가다 보니 결국 동료로부터 독하고 모진 독종이라고 왕따를 당하고 놀림의 대상이었다. 술과 담배는 사치품이라 여겨 아예 배우지 않고 향락에서 멀어져야만 했던 시절, 자신이 생각해도 앉은자리 풀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자린고비보다도 더 지독하게 살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건설현장에서 허리를 다쳐도 그 악마 같은 돈 때문에 입원도 못하고 겨우 집에서 한방 침과 찜질로 치료를 받아야만 했고, 과로로 인한 사고로 몸도 마음도 상처를 받아 도망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피할 수 없는 현실, 아픔과 일은 바느질처럼 촘촘히 이어져 갔다.

삶 전부가 되어버린 일, 인간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다고 그야말로 노동 속에 묻혀 주위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일을 한 보상의 대가는 굵은 손마디, 솥뚜껑처럼 커져 버린 커다란 손이었다.

우리 일상은 거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할 일이 많고 눈앞에 펼쳐진 야망의 세계는 실로 엄청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분에게 삶의 족쇄가 돼버린 가족의 생계는 야망과 꿈을 옭아맸다. 은퇴라는 길목까지 달려오는 동안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성공하였지만, 막상 노년의 문턱에 다다르니 자신이 여가선용할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삶의 문화를 놓쳐 버린 것이다.

무료한 시간 속을 헤매던 어느 날, 망설임 끝에 동료의 도움을 받아 겨우 평생교육원 문을 두드리며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어설프고 낯선 취미, 몇 번을 되돌아왔던 문, 어렵사리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똑같은 마음으로 한곳을 향해 전진하는 곳이었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은퇴 시기는 갈수록 앞당겨지고 노후의 삶은 길어지고 있는 현실, 모든 것이 다 중요하겠지만 노년의 길을 손 잡고 걸어갈 수 있는 취미를 찾아 동아리회원들과 걸어가는 황혼길, 삶의 질이 윤택해지고 건강해진 은빛이다. 그렇게 손 큰 그분은 노년의 문턱에서 새 삶을 충전하고 있다.

학습발표회를 지켜보는 내가 더 불안했다. 물론 프로들이 아니라서 실수가 용납될 수도 있겠지만, 무대에 선다는 게, 관객 앞에 선다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진대 어찌 긴장되지 않고 떨리지 않겠는가. 오늘 무대에 서기까지 많은 시간을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는 바로 은퇴 이후 아름다운 황혼을 아름답게 칠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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