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길로 갈까요?(1)
어떤 길로 갈까요?(1)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7.1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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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산의 정상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그렇지만 어느 길이 든 여러 갈래 길을 모두 갈 수는 없다. 산을 오르는 길이 여러 군데가 있듯 종교를 산의 정상으로 생각하면 불교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고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올라가는 길 등 다양한 길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르고자 하는 산의 정상은 결국 같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산의 정상이 곧 극락이 될 수 있고 천당이 될 수도 있고 천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어떤 길로 갈까?

우리고장 청주의 사찰로 국보 297호인 영산회 괘불탱이 있는 안심사도 있고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3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는 용암동 보살사도 있다. 그러나 해설사가 해설을 하는 유일한 곳은 보물 985호로 지정된 유등보살이 있는 사직동의 용화사다.

용화사는 도심 한 가운데 그것도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고 위치상으로 기본적 가람 배치가 어렵게 되어 있어, 일주문과 수미산 중턱에서 동서남북을 지키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사대천왕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과 금강문 불이문은 없다. 그렇지만 대중들의 포교를 목적으로 불교대학원을 운영하고 있어 많은 불자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곳이라 항상 많은 불교 신도들로 성시를 이루는 곳이다.

용화사는 1902년 창건된 법주사의 말사로 고려시대 7존 석불군상을 모시고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창건 당시 사찰 규모는 미륵전 15칸, 산신각 13칸, 설교전 15칸, 요사체 4칸의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그러나 을사늑약 등으로 일제가 한반도에서 세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1907년부터 한동안 이 절은 청주재판소로 사용되어 고난의 민족사를 증명하는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0년 6.25 전쟁 당시 화재로 법당이 완전 소실되었다.

용화사 인근의 옛 절터인 사뇌사와 관련해서는 조계종의 2대 종조인 진각국사 혜심이 하안거를 지냈다는 문헌 기록이 남아 있다. 1993년 무심천 제방 공사 중 용화사 부근에서 사뇌사 유물로 추정되는 금동 광배, 향로, 촛대, 숟가락, 금강경 등의 400여점의 출토(현재 국립 청주박물관 소장) 되었다. 청동반자 명문 판독 등으로 고려 후기 사뇌사의 자리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용화사 석불상군과 사뇌사와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사뇌사는 신라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된 대사찰로 알려졌다. 학자들에 의하면 유물들이 매몰된 것은 몽고의 4차 침입 때로 추정되며, 어떤 급박한 상황에서 일시에 묻어둔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일설에는 삼국통일의 의지가 태동하던 선덕여왕대에 미륵 칠존불을 중심으로 70칸 규모의 사찰로 창건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신라 화랑들의 심신단련과 군사들의 충성을 맹세하는 도량으로 활용되었다고도 한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법당이 소실되었고 미륵불은 대홍수로 무심천에 묻혔다고 전해 오고 있다.

이곳 용화사의 1993년 10월에 기록한 법당의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광무 6년(1902년) 3월 14일 고종의 후궁인 엄비의 명에 의해 청주군수 이희복이 창건했다고 한다.

용화사 창건에 얽힌 설화다. 1902년(고종 광무 6년) 나라는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고 민심이 흉흉했다. 밖으로는 일제의 강압과 개화의 물결이 밀려 들어와 국력은 쇠퇴하고, 백성들이 살기 어려울 때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잃게 된다. 그런데 새로 맞이한 엄비가 내당에서 잠을 자던 중 이상한 꿈을 꾼다.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면서 엄비의 처소를 향해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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