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군인의 일기
어느 군인의 일기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5.07.1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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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보은·옥천·영동>

‘먼저, 내가 죽는다면 우리 가족, 부모 형제, 아내와 자식들은 아들과 남편, 아버지로서보다 훌륭한 군인으로서의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담담하고 절제된 행동을 보였으면 한다’.

1992년 12월 어느 날 스물 다섯의 한 젊은 공군 장교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 다음은 장례식을 부대장으로 하고 유족들은 부대에 최소한의 피해만 줄 수 있도록 절차 및 요구사항을 줄여야 한다. 또, 각종 위로금의 일부를 떼어서 반드시 부대 및 해당 대대에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한다. 진정된 후에 감사했다는 편지를 유족의 이름으로 부대장에게 보내면 좋겠다. 더욱이, 경건하고 신성한 아들의 죽음을 맞이하여 돈 문제로 마찰을 빚는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돈으로 해서 대의를 그르치지 말아야겠다. 장례 도중이나 그 이후라도 내가 부모의 자식이라고만 여기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 조국이 나를 위해 부대장을 치르는 것은 나를 조국의 아들로 생각해서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이 말을 명심하고 가족의 슬픔만 생각하고서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나로 인해 조국의 재산과 군의 사기를 실추하였음을 깊이 사과할 줄 알아야겠다’.

그는 비행기 사고로 순직한 동료 조종사의 장례식에 다녀와서 이 일기를 남겼다. 동료의 장례식에서 늘 목숨을 건 비행을 해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절감하고는 일기를 통해 가족들에게 유서를 전한 것으로 보인다.

일기는 불행하게도 18년 후 현실이 된다. 2010년 3월 그는 강원도 강릉에서 부하 조종사를 지도하기 위해 전투기에 동승했다가 다른 전투기와의 충돌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43세의 나이로 산화한 고 오충현 대령이 일기의 주인공이다.

그의 일기는 이렇게 맺어진다. ‘군인은 오직 충성, 이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세상이 변하고 타락해도 군인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영원한 연인 조국을 위해서 오로지 희생만을 보여야 한다’.

일기를 시종 관통하는 것은 군인으로서의 무한한 자부심과 자긍심이다.

소박한 장례 절차를 강조하는 대목에서도 ‘나를 부모님의 자식이라고만 여기지 말고 조국의 아들로 생각해 달라’고 당부한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이 조국의 재산과 군의 사기를 떨어트린 데 대해 사과할 것’을 부탁한다.

그의 일기가 새삼 떠오른 것은 정부합동수사단이 그제 발표한 방위사업비리 중간수사 결과를 보고나서다. 비리 규모가 1조원에 달했고 63명의 군인이 기소됐다. 전 해군참모총장 2명을 포함해 장성이 10명이나 됐다. 퇴역 후 업체에 재취업한 선배와 현역 후배들이 한통속이 돼 장병들의 목숨이 걸린 국방예산을 거침없이 도둑질 했다. 가라앉지 않는 잠수함, 어선에나 사용할만한 싸구려 전파탐지기를 단 구조함, 총알에 뻥뻥 뚫리는 방탄복 등이 이들의 협잡을 거쳐 남품됐다. 이들에게는 군인으로서 자부심은커녕 최소한의 의무감, 한줌의 염치조차도 없었다.

고 오 대령은 ‘세상이 모두 타락해도 군인은 변해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군은 세상 어느 곳보다 썩은 곳이 돼버렸다. 23년 전 쓰여진 한 군인의 일기는 비단 군에만 경종을 울리지 않는다. 이 나라에 군의 부패를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는 분야가 얼마나 되겠는가. 국가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정치인을 비롯해 공복을 자임하는 사람들이라면 곱씹어 볼 일이다. 조국의 연인을 자처하며 처연한 마음으로 심신을 가다듬은 한 젊은 장교의 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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