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북루의 추억
공북루의 추억
  • 박상일 <청주문화원 부원장>
  • 승인 2015.07.16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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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박상일 <청주문화원 부원장>

밀양에 가면 영남루가 있고 남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광한루다. 삼척에는 죽서루가 있고 진주에는 촉석루가 있어 지역을 대표하는 경승지로 꼽힌다. 경승지에 세워진 누정은 동양의 정신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시인묵객이 모여 음풍명월을 하던 누정은 만남과 유희의 장소라는 공간적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과 자연을 맺어주는 철학과 인문학의 구현체이며 문학의 산실이었다는 사실이다.

누정이란 누각과 정자를 말한다. 고려의 대학자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지붕 위에 지붕을 올린 집을 누’라 하고, ‘사방이 툭 트이고 널찍하게 비도록 만든 집을 정자’라 한다고 명확히 정의했다. 즉 ‘누’는 형상에 따라 ‘정’은 기능에 따라 정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누각은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대개 높은 언덕이나 돌 또는 흙으로 쌓아올린 축대 위에 2층 이상으로 지은 건축물을 말하며 정자는 벽이 없이 탁 트인 건물로 누각보다 규모가 작고 학문과 저술 활동을 위해 소박하게 지은 건축물이라 구별하면 될 것이다.

청주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누정은 중앙공원에 옮겨 세운 망선루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청주를 대표하는 누각은 공북루(拱北樓)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공북루가 고을 북쪽 3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내덕동이나 사천동쯤의 무심천변에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리고 공북루에서 고려의 문신들이 공민왕에게 지어 바친 26편의 시가 전해진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개성이 함락되자 왕은 대신들을 이끌고 안동으로 몽진하여 3개월가량 머무르다 귀환하는 길에 청주에서 약 5개월간 머물게 된다.

청주가 고려의 임시수도 역할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체류 기간이 길어지자 과거시험까지 보게 되어 그 합격자의 이름을 새겨 망선루에 걸었던 유명한 일화도 있다.

1362년 9월 19일 공민왕은 청주에 있으면서 공북루에 올라 배표(拜表)의식을 거행했다.

공북루는 ‘북쪽(개경)을 섬긴다’는 뜻이고, 배표는 사신으로 보내는 신하를 전송하는 의식을 말한다.

공민왕은 본래 원나라를 철저히 배척하는 정책을 추구했으나 홍건적 침입으로 국토가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는 일시적이나마 배원정책을 철회하고 강지연(姜之衍)을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게 되는데 이때 청주 공북루에서 환송식을 열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이미 공북루에 걸려 있던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차운해 응제시를 짓도록 했고 후세 사람들이 이 시들을 목판에 새겨 공북루에 걸어 기념했다.

목은 이색은 ‘임금님 수레 이른 새벽에 움직이니/ 문물이 태평할 시초로다/ 누각이 높으니 하늘 보기 가까운데/ 임금님 분부 받들어 시를 이루네/ 산 빛에 기쁨이 떠돌고/ 가을 기운이 하늘에 가득 차네/ 다른 날 남녘으로 수행하실 제/ 함향(含香)이 나에게도 있으리’라 했고, 익재 이제현은 ‘나라 남쪽을 두루 살피시는 날/ 표를 북루에서 처음 올렸소/ 술통 앞에 호탕하게 흥이 겨워/ 거침없이 붓을 놀려 글을 쓰노라/ 바람은 높아 기러기 물가를 따르고/ 구름은 맑은데 학은 허공을 날도다/ 늙어 가매 이제 병이 많으니/ 임금의 은혜 슬퍼하는 나를 저버리려는갗라고 노래했다.

공북루는 영조 때 현감 이유신이 중건했고 그후 목사 이수득이 중수하기도 했는데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이라도 무심천변에 복원해 조선 3대 누각이라는 영남루 촉석루 부벽루 부럽지 않게 옛날의 영화를 추억할 수 있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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