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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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5.07.1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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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한 학기가 끝났다. 방학이다. 아이들은 학교생활에서 잠시라도 벗어난다는 것이 좋은가 보다. 나는 아이들에게 자유주제로 글을 다섯편씩 써오라고 숙제를 냈다. 목소리가 높아진다. 한편만 줄여달라고 졸라대는 말에 애교가 가득이다.

수업이 끝나자 6학년 서진이가 내게 곽 속에 든 치약 한개를 건네고 후다닥 뛰어나간다. 치아관리 잘하라며 준 치약 곽 속에는 치약은 없고 손 편지 두 장과 작은 모형 케이크가 들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웃음이 터졌다. 얼마 만에 받아 본 편지인가. 한학기 동안 함께 공부하면서 선생님이 좋아졌다고 한다. 아이에게 받은 편지인데도 몹시 설렜??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기차통학을 했었다. 2학년이 되던 어느 날 우리 반은 책가방 검사를 받았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가방 안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꺼내놓고 차례를 기다렸다. 내 책상 옆에서 선생님은 어찌나 꼼꼼하게 검사를 하시는지 가방 안은 물론 겉에 있는 지퍼까지 열고 확인을 하신다. 선생님의 굳은 표정을 보면 잘못이 없어도 잘못한 사람처럼 전전긍긍인데 알 수 없는 편지를 발견하시고 눈으로 읽으며 얼굴이 점점 더 굳어지셨다.

그날 수업이 모두 끝나고 교무실로 간 나는 저녁통학열차를 타야 하는 시간 전까지 담임선생님 책상 옆에서 무릎 꿇고 벌을 받았다. 편지는 열차 안에서 어느 남학생이 내 가방에 몰래 넣어 둔 연서였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어서 어느 학교 누구냐고 다그치셔도 상대를 알 수 없으니 답변할 말이 없었다. 그저 부끄럽고 억울했다. 편지사건 후로 통학열차를 이용하면서 남학생들만 보면 눈을 내리깔았다. 내심 괘씸하기도 했다. 한 번으로 끝낼 것 같으면 애당초 시작하지 말일이지 섭섭함과 아쉬움도 있었다.

문학을 하면서 내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분이 있다. 청마 유치환 시인이다. 기혼자였던 시인이 남편과 사별한 정운 이영도 여사에게 스무해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낸 편지는 연애시었다. 절절한 마음으로 보낸 편지를 상대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배달되어온 편지는 몸서리를 쳐지게 했을 것이다. 날마다 통영 앞바다가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 연인에게 쓰는 편지는 얼마나 감미로울 것인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 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청마의 시 행복의 1연이다. 편지만으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시인의 지치지 않는 사랑과 문장력이 경이롭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받는다는 것은 낭만적이다. 학창시절에 알 수 없는 남학생에게 받은 편지로 곤혹을 치렀어도 지금은 그마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젠 이영도 여사처럼 뜨거운 연서를 받을 일도 없을 터이다. 그러나 서로의 안부를 묻는 편지도 반갑겠다. 뜬구름 같은 꿈이라도 연애편지라면 더욱 좋겠다. 한동안 잔잔한 행복을 일렁이게 하는 서진이의 편지가 마음을 푸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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